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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2023. 9. 28.

성경본문 보기

누가복음 13장 10절 ~ 17절 [개역개정]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설교문 보기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몇 가지 율법의 규정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솨)바트(שַׁבָּת)’는 ‘안식하다’ 즉 ‘편히 쉬다’는 뜻의 동사(שָׁבַת)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출 31:17)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엿새 동안 수고한 몸을 쉬게하고(출 23:12),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레 23:3). 그러니까 육체의 쉼을 통해서 기운을 회복하고 예배를 통해 영혼의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사역(창 2:2-3 ; 출 31:17)을 기억하고 출애굽사건(신 5:15)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잊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출 19:5-6). 그래서 안식일은 할례와 더불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증표였습니다(창 17:11 ; 출 31:13).

이 날에는 어떤 일을 해서도, 시켜서도 안 되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가축도 쉬어야 했습니다(출 20:10). 농사철에도 안식일을 지켜야 했고(출 34:21) 심지어 불을 피우는 일도 금지되었습니다(출 35:3). 그리고 성회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집회를 가져야 했습니다(레 23:3). 이를 어기는 행위는 곧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제외되었습니다(창 17:14 ; 출 35:2). 그러나 몇 가지 예외 사항은 있습니다. 할례의 경우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행했는데 그날이 안식일이어도 집행되었습니다(창 17:12). 또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마 12:5). 그들은 안식일마다 진설병을 교체하고(레 24:8),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상번제를 안식일에도 거르지 말아야 했습니다(민 28:3-10). 이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안식일의 규정에 위배되는 것이지만 죄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외경이라 불리는 마카베오서를 보면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느 정도로 지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점령한 시리아 군대와 맞서 싸웠는데, 안식일에는 일절 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아무 저항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마카베오상 2:38). 후에 안식일이라도 자신들을 공격하는 자가 있으면 맞서 싸우기로 결의를 했지만(마카베오상 2:41)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경전인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규정되어 있고, 그에 관한 세부지침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생명이 위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병자를 치료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것입니다(Mishnah Yoma 8:6).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안식일에 종종 병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살펴볼 사건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에게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허리가 굽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얹으시자 여인이 즉시 허리를 곧게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 병마로 시달리다 고침을 받은 여인은 물론이고 회당에 모여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기뻐했습니다(눅 13:17).

반면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의 한 명이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모든 사무를 관할하는 일종의 종교 지도자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일하는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고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눅 13:14).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치시고 천병(天病)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여기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봤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가 굽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던 그만큼 고치기 힘든 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께서 안수하신 것만으로 고침 받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요 3:2).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본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신 18:15) 곧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그 광경을 직접 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회당장은 바리새인 못지않은 전형적인 형식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린 여인은 비록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그녀의 병을 고치는 것은 규정을 위반한 것이고 그래서 이를 문제 삼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눅 13:15). '합당치 아니하냐'는 말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혹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당위성의 문제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인 미쉬나에 의하면 짐을 싣지 않는 한 안식일에도 가축을 밖으로 끌고 나가 갈 수 있었고, 안식일에 다닐 수 있는 거리(2,000 규빗 약 900미터, 행 1:12)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물을 먹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안식일에 물을 퍼서 물통에 넣는 것은 금하면서도 가축을 물통까지 이끌고 가서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허용했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이 가축들에 대해서는 안식일에 관한 규정이 융통성 있게 지켜지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요했습니다. 사람에 비하여 보잘것없는 짐승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기 위해 안식일에도 외양간에서 소나 나귀를 풀어 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데 하물며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 매여 고통 속에 살아온 여인을 그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논리였습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누가복음 6장과 마태복음 12장 그리고 마가복음 3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좋은지를 물었습니다(마 12:10).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렸던 여인처럼 생명이 위중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병을 고치는 행위 역시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생명이 위급한 경우 환자의 치료 행위를 허용하고 있는 미쉬나의 규정은 가축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가축이 구덩이에 빠지면 먼저 음식을 넣어주고 위급하면 끌어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것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위급한 환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치료하는 행위는 안식일의 규정을 어긴 죄가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병을 치료하는 것은 생계에 직결되는 위급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비록 외관상으로는 생명이 위급한 상태는 아니지만 당사자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위중한 상황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위급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안식일에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마 12:12 ; 막 3:4 ; 눅 6:9). '선'이란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과 연관됩니다. 즉 안식일에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선한 일이기 때문에 결코 정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사 58:13)처럼 세속적인 일에 대해서는 쉬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까지 중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사람들을 제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체의 쉼을 통해서 기운을 회복하고 예배를 통해 영혼의 쉼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한 마디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제도입니다(막 2:27).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을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마 23:4).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문제로 시비를 거는 자들에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호 6:6)는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2:7).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미 6:8). 이것이 어떤 제물, 어떤 제사보다 더 낫습니다(막 12:33).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지자들을 통해 누차 강조하셨지만 유대인들 특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조상들의 전통을 더 신뢰했으며(마 15:3),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뜻은 무시해 버렸습니다(마 23:23). 말씀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했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말씀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위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마 23:23).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환자를 고치는 것이 유대인들의 반발을 살 것을 아셨지만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안식일을 본래의 목적대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안식일에 사탄에게 매인 바 되어 고통을 겪는 사람을 그 매임에서 풀어주어 육체에 쉼을 주고 나아가 영혼의 안식을 주는 것 그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목적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열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