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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2023. 10. 4.

성경본문 보기

누가복음 15장 11절 ~ 32절 [개역개정]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설교문 보기

본문은 일명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데, '회개와 구원' 그리고 '용서와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해서 '복음 중의 복음'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잃은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눅 15:4-9)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눅 15:7, 10). 그러면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이 상속받게 될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세리나 죄인(눅 15:1) 또는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재산의 상속은 아버지의 임종 직전에 행해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창 25:5-6) 작은 아들의 요구는 무례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며칠 후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정리해서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이것도 유대인의 관례상 어긋난 것인데, 유대에서는 비록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을 물려받았다 해도 이를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작은 아들은 상속받은 재산을 임의로 처분해서 그것을 가지고 멀리 떠났습니다.

작은 아들은 그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자 작은 아들의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작은 아들을 들로 보내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에(레 11:7 ; 신 14:8) 그 고기를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치는 것조차도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때 그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배불리 먹고 마시며 즐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돼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줍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싶었습니다(엡 2:3).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신이 상속받게 될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돈이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 살다가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작은 아들은 비참한 처지에 놓이자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부하여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눅 15:17)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8-19)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삶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며 그것이 곧 죄악 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 것만으로 회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가 내린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받은 돈을 다시 돌려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마 27:4). 그는 비록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쳤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은 회개를 위한 첫걸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에는 반드시 '회심'이 있어야 합니다(행 3:19 ; 26:30). 회심(ἐπιστρέφω)이란 '방향을 바꾼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던 마음과 삶을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칠 뿐만 아니라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겔 18:30). 마음의 변화에 따른 행동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참된 회개입니다(신 30:8-9 ; 살전 1:9). 만일 작은 아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으로만 끝났다면 그는 가룟 유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므로 용서함을 받았고 다시금 아들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 줄곧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작은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거리를 살피고 있었는데, 저 멀리 아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아들을 안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 이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일꾼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가 함께 먹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잔치를 벌이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왔고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다시금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사랑으로 맞이해 주었고 그가 잘못을 빌 때에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든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라고 계십니다(딤전 2:4 ; 벧후 3:9).

사실 세상 아버지들에게 있어서 작은 아들과 같은 탕자를 아무런 책망도 조건도 없이 맞아들인다는 것은 거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그런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안아 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아무런 책망 없이 맞아주시고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단순히 맞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온 것처럼,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맞아주십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큰 아들입니다. 이 비유에서 큰 아들은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 또는 유대인을 가리킵니다(눅 15:2). 그는 밭에서 돌아오다가 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종으로부터 아버지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였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달래자 그는 볼멘소리로 말했습니다. "제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왔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는데도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놀아나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없애 버린 동생이 돌아왔다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동생이 집을 나간 후 어떻게 살았는지 소식을 들었거나 아니면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는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이 미웠고, 그런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인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볼멘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의 말속에서 우리는 큰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위선자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혹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외식하는 자'였습니다. 외식(外飾)이란 '겉만 보기 좋게 꾸며 드러낸다'는 뜻으로 '위선'과 같은 의미입니다.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위선자입니다.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민생 영수회담' 제안에 대해 국민의 힘 대변인은 논평에서 '사심불구(蛇心佛口)'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 말은 '뱀의 마음에 부처의 입'이라는 뜻으로, 속은 간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착한 말을 하는 행동을 이르는 사자성어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대지도자들도 그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속은 탐욕과 방탕과 사악함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깨끗한 척 행동하고 말하는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마 23:25 ; 눅 11:39).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23:3).

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율법학자)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눅 16:14).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가로채기도 했는데(막 12:40),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이용해 돈을 착복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르반 제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고르반(קָרְבָּן)‘이란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란 뜻으로(레 1:2), 장로들의 전통[미쉬나]에 따르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드리려던 것을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다고 하면 부모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칩니다(막 7:11). 부모를 공경하는데 써야 할 돈을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해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마 15:5). 장로들의 전통을 중시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께 대한 의무만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이를 악용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부모에게는 고르반이라고 말하고, 제사장들과 결탁을 해서 고르반의 일부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도로 갖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으로 결국은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헌금을 많이 하므로 자신을 과시하려고 했겠지만 오히려 위선자라는 책망만 들을 뿐이었습니다(마 15:7 등).

큰 아들이 바로 그런 자입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왔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거짓말이거나 과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버지가 들어가자고 권했을 때 완강하게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권했다'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계속 간청했음을 의미합니다. 작은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큰 아들은 자기가 말한 대로 그 뜻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큰 아들은 자신의 불만만 표출했습니다.

또 큰 아들은 동생을 죄인 취급하며 아버지가 자신을 홀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이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아버지의 처사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동생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생을 동생이 아닌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죄인으로 취급했으며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금기시했던 바리새인들처럼(마 9:12 ; 눅 5:30) 동생과 함께 먹는 것을 꺼려했던 것입니다. 큰 아들의 눈에는 동생이 보이지 않고 그가 탕진한 재물만 보였습니다. 

사실 큰 아들은 동생이 아버지께 상속받은 재산을 탕진한 것에 대해 뭐라 할 권한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동생이 자기의 것을 사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망을 하려면 큰 아들이 아닌 아버지가 해야 합니다. 비록 작은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했지만 그 사용권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은 형에게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은 형이 아닌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눅 15:21). 오히려 큰 아들은 작은 아들보다 더 많은 재산과 권한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는 맏아들로서 동생보다 배나 더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을 뿐만 아니라 장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 사용권이 아버지에게 있지만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입니다(눅 15:31). 그런데도 큰 아들은 마치 동생이 자기의 재산을 탕진한 것처럼 그를 비난했습니다. 또 그런 동생을 아들로 받아주고 그를 위해 잔치를 베푼 아버지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므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마땅하다'는 말은 '합당하다'(눅 13:16)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당위성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어버렸다가 찾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맞아주신 것처럼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죄인들을 기쁨으로 맞아주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그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세리나, 유대인이나 그들이 짐승처럼 여기는 이방인이나 하나님께는 모두 소중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십니다(딤전 2:4 ; 벧후 3:9). 그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과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뿐만 아니라(사 1:18) 그들을 기쁨으로 맞아 주십니다. 우리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우리는 기쁨으로 환영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그것을 문제삼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 자들을 우리가 왈가불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는 그 뜻에 기쁨으로 순종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