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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2023. 10. 22.

성경본문 보기

역대상 5장 1절 ~ 2절 [개역개정]

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설교문 보기

야곱(이스라엘)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맏아들은 르우벤입니다. 맏아들에게는 장자의 명분이 주어졌는데, '장자의 명분'이란 아버지를 계승하는 가장의 권리를 의미합니다. 장자는 그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고, 재산 상속 시에는 다른 형제의 두 몫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신 21:17).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장자는 영적인 축복의 후계자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르우벤은 이스라엘의 맏아들로서 장자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모인 빌하를 범하므로(창 35:22 ; 레 18:8)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합니다(대상 5:1).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에 의하면 르우벤은 그 성격이 ‘물의 끓음’(창 49:4) 같았습니다. 즉 조급하고 충동적이며 정욕적인 성격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므로 장자의 권리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르우벤이 잃어버린 장자의 권리는 누구에게 넘어갔을 까요? 많은 사람들이 유다에게서 주권자가 났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이 유다에게로 넘어간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권자란 다윗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삼하 5:2)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창 49:10).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장자의 명분이 유다가 아니라 요셉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2) 유다 지파가 다른 지파들보다 뛰어난 것은 유다 그 자신 때문이 아니라 주권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파에서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다와 요셉 두 사람만 놓고 볼 때 유다보다는 요셉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노년 즉 91세에 얻은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는데, 그것 때문에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요셉을 미워한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창 37:8). 요셉은 두 꿈을 꾸었는데, 하나는 형제들의 곡식 단들이 자신의 곡식 단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양과 달과 열 한 별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의 꿈 얘기를 들은 형들은 매우 불쾌해했습니다. 그것은 동생인 요셉이 자신들보다 더 뛰어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하며 시기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어느 날 형들이 도단에서 양을 치고 있었는데, 요셉이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형들과 양 떼가 잘 있는지를 보고 오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창 37:14).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며 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요셉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형들로부터 위협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나 형들에게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순종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 상황이나 환경을 배제시키고 아무 조건 없이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을 누구보다 잘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너는 네 고향과 친척과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하셨을 때 그곳이 어디인지, 왜 가야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히 11:8).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약속이란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창 21:12 ; 히 11:1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이는 오직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자‘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창 12:2). 즉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약속이 틀리다고 따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번제로 드려져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9).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고 이러한 믿음이 그를 절대순종으로 이끈 것입니다.

당시 열일곱 살의 요셉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멀리서 오는 그를 보고 ‘꿈꾸는 자가 온다’고 말합니다. 이는 요셉을 조롱하는 말로 그들이 요셉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의 꿈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형들은 요셉이 죽으면 그의 꿈들은 자연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죽이기로 모의합니다(창 37:20). 하지만 요셉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니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형들은 요셉을 죽이지 못하고 대신 유다의 제안대로 그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이십을 받고 팔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의해 은 삼십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겨졌습니다(마 26:15). 형들은 요셉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노예로 팔린 이상 그의 꿈은 이제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노예로 팔린 것은 형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의 꿈을 무마시키기 위해 노예로 팔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이끌려 애굽에 내려간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였습니다(창 41:46).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의 나이도 서른 살쯤이었습니다(눅 3:23). 요셉이 노예로 팔려 애굽에 내려간 것도 그렇지만 애굽의 총리가 된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흉년으로부터 요셉의 형제들을 구원해 주시고 그들의 후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기 위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 것입니다(창 45:7-8). 어느 신학자(Hughes)는 이를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노예로 보냈지만 하나님은 그를 구세주로 보내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요셉은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을 흉년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애굽으로 보냄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의 구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요일 4:14).

요셉은 애굽에서 두 아들 곧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았는데, 야곱은 그들이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창 48:5). 이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야곱의 아들이 되어 다른 아들들과 같은 지위와 권리를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훗날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는 레위지파가 빠지고 그 자리를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각각 한 지파씩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르우벤이 잃어버린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르우벤처럼 장자의 권리를 잃어버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르우벤의 삼촌인 에서입니다. 에서는 ‘털이 많다’는 뜻으로, 그의 온몸이 마치 털옷을 입은 것 같아서 지어진 이름입니다(창 25:25). 그는 장성하여 능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주로 들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반면에 그의 쌍둥이 동생인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어서 집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야곱에게도 한 가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장자의 명분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야곱은 어머니의 태 속에서 형 에서와 싸웠고(창 25:22) 태에서 나올 때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있었습니다(창 22:26). 그래서 그의 이름이 ‘발뒤꿈치를 잡다’는 뜻의 야곱입니다. 결국 야곱은 에서에게 주어진 장자의 명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데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와서 야곱에게 “배가 고파 죽겠으니 그 붉은 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별명이 ‘붉다’는 뜻의 에돔이었고(창 25:30) 그의 후손을 에돔 족속이라 불렀습니다. 야곱은 팥죽을 달라는 에서에게 ‘형이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을 자신에게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는데 이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팥죽 한 그릇을 먹는 대가로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장자의 명분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럼에도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릴 정도로 장자의 명분을 너무 가벼이 여겼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했습니다(히 12:16). ‘망령되다’란 말은 ‘경건치 못하다’ 혹은 ‘세속적이다’는 뜻으로,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에서는 단지 팥죽 한 그릇 즉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을 위해 장자의 명분 곧 영적인 축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에서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구했지만 회개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눈물은 잃어버린 장자의 복을 도로 찾기 위한 눈물이었지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일도 없겠지만 설사 에서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한다고 해도 장자의 축복을 되돌려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미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기기로 맹세를 했기 때문에(창 25:33) 그 맹세는 지켜져야 했고(마 5:33), 아버지 이삭도 하나님 앞에서 축복한 것을 마음대로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창 27:37). 에서처럼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거나 소홀히 하는 자들은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 번 닫힌 구원의 문, 축복의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25:10).

형 에서와 다르게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귀하에 여겼습니다. 하지만 동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전해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임신을 했을 때 태 속에서 아이들이 서로 싸웠습니다.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했는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뱃속이 요동을 치자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라고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려고 가서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리브가는 이 말씀을 야곱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장자의 명분을 꿈꿨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결코 선하지도 않았고 정당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형제끼리 장자의 명분을 사고팔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에서의 말처럼(창 27:36) 그를 속여서 장자의 권리를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비록 형의 어리석음과 배고픔을 이용하고 팥 죽 한 그릇이라는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거래를 했지만 그 잘못은 야곱보다는 에서에게 있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넘긴 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것이고(창 25:22) 귀하고 중한 장자의 명분을 음식 한 그릇에 팔아넘길 정도로 너무 가볍게 여긴 까닭이었습니다(창 25:34). 문제는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 정당하지 못한, 불의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야곱으로 하여금 큰 아들에서 대신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남편인 이삭이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리브가는 에서의 의복을 가져다가 야곱에게 입히고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혀서 그를 에서처럼 꾸몄습니다. 야곱은 이 사실이 발각되면 아버지를 속인 죄로 축복은커녕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지만 '그 저주는 내가 받을 테니 너는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따랐습니다(창 27:12-13).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리브가와 야곱이 공모를 한 것입니다. 심지어 야곱은 거짓을 감추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창 27:20).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한 것이기도 합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았던 이삭은 야곱을 의심했습니다. 목소리는 틀림없이 야곱인데 에서라고 하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만져보고 옷의 향취를 맡아보았지만 그것은 또 에서의 것이었습니다(창 27:21-22, 27). 이렇게 야곱은 분별하지 못하고 야곱을 축복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창 25:23). 비록 야곱이 그의 소망대로 장자의 명분을 얻었고 장자로서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를 위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한 대가는 치러야 했습니다(창 47:9). 결과나 목적이 수단이나 방법을 정당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선하고 결과가 좋으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거나 상관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 목적은 언제나 선해야 하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까지도 순수하고 정당해야 합니다. 영적인 목적을 위해 세상적인 수단을, 의로운 목적을 위해 불의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장자로서의 축복을 받지 못한 에서는 다른 축복이라도 받기를 원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창 27:38)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나는 아무런 축복이라도 갖겠습니다. 비록 신앙의 축복은 받지 못한다 해도 어떤 다른 축복이라도 갖게 해 주십시오.’ 에서의 요구대로 그는 축복을 받았지만 사실 그것은 축복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주에 가깝습니다.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창 27:39-40) 이스라엘은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해서 많은 양의 이슬이 내리는데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이슬은 식물의 생존에 절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이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습니다(신 33:28 ; 잠 3:20). 그리고 땅의 기름짐은 토지가 비옥한 것을 뜻하는데, 이는 결국 소산물의 풍성함을, 나아가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에서의 축복에는 하늘의 이슬도, 땅의 기름짐도 없었습니다. 훗날 에서와 그의 후손인 에돔 족속은 야곱의 예언대로 메마른 산악 지대인 세일에 거하게 됩니다(창 32:3 ; 신 2:5). 세일은 지금의 요르단 남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야곱과 에서가 받은 축복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에서의 축복에는 영적인 것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관계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세상의 복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가지려고 했던 것은 다른 형제들보다 재산을 더 상속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적인 축복의 후계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하늘의 것이 아닌 세상의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배고픔 때문에 그것도 팥죽 한 그릇 먹으려고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후에 에서는 이 권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한 번 넘어간 장자의 명분은 다시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현실 문제에 급급해서 신앙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한 끼 식사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세의 문제도 중요하고 세상의 것들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만 영적인 문제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하늘의 것은 세상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언제가 사라질 것이지만 하늘의 것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것 때문에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팥죽이냐 장자의 명분이냐는 선택의 기로에서 언제나 세상적인 것이 아닌 하늘의 것, 불신앙이 아닌 신앙을 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