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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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5절 ~ 10절 [개역개정]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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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무익한 종’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마 25:30). 사업을 해보라고 맡긴 달란트를 그냥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4, 25). ‘굳은 사람’이란 ‘매정하고 가혹한 사람’이란 뜻이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는 것은 ‘뿌리지 않은 데서 모은다’는 뜻으로 ‘심지 않은 데서 거둔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만일 사업을 하다가 돈을 잃게 되면 주인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는 대신 그 돈을 땅에 숨겨 두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이윤은 남기지 못했더라도 손해를 보지 않았으니 책망받을 일도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지 않더라도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인이 지적한 대로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취리하는 자’란 오늘날의 은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돈을 잃을까봐 사업을 하지 못했다면 그 돈을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믿고 돈을 맡긴 주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입니다(마 25:27).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큰 잘못은 주인에 대해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재산을 맡겼기 때문에 최선만 다한다면 충분히 이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설사 손해를 보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책망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매정하거나 가혹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당했습니다. 그는 더이상 주인에게 아무 쓸모없는 무익한 종이었기 때문입니다(마 25:30).
오늘 본문에도 무익한 종이 나오는데, 둘은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의 무익한 종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맡긴 일을 하지 않아서 주인으로부터 무익한 종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종은 주인의 명령을 다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베드로가 용서에 대해 일곱이라는 숫자를 사용한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에 대하여 세 번까지는 용서해야 된다고 가르쳤고, 랍비 격언에 ‘세 번 용서하는 자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말도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예수님께 칭찬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며,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눅 17:4). 이는 용서의 횟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용서해 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 한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비유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혹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우리입니다. 만 달란트는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의 빚입니다. 이 빚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도 갚을 수 없고 누가 대신 갚아줄 수도 없을 만큼 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그만큼 큰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종을 불쌍히 여기고 아무 조건없이 그 빚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값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롬 3:24). 반면에 백 데라니온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범한 죄의 빚입니다. 만 달란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지은 죄는 내가 하나님께 범한 죄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용서를 하되 마음으로부터 즉 진정으로 용서해야 합니다(마 18:35).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입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미워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실족지 않게 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닙니다(눅 17:1).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고의든 실수든 잘못을 저지르거나 비신앙적인 행동을 보일 때가 있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시험에 들거나 신앙에서 멀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그를 책망하기도 했습니다(갈 2:11-14).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이나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그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믿음을 더 해주시기를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5:6) 마태복음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마 17:20).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은 겨자 씨가 아니라 서양란의 일종인 에비비틱란의 씨로 알려져 있는데 얼마나 작은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비록 겨자 씨가 씨앗 중에서 제일 작은 것은 아니지만 당시 유대 격언에서는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할 때 ‘겨자씨만큼 작은 것’이라고 할 정도로 겨자씨는 크기가 매우 작은 씨앗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제자들이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도 없다는 것을 책망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믿음 없음에 대하여 예수님께 종종 책망을 들었습니다(마 8:26 ; 14:31 ; 16:8 ; 17:20 ; 막 4:40 ; 눅 8:25). 반면에 작은 겨자씨라도 그 안에 생명력이 있어 후에 큰 나무가 되듯이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라는 의미로 보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 생명력 있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겨자씨 한 알 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관한 말씀에 이어 ‘무익한 종’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루 일곱 번이라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하면 그대로 되어지는 기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여기서 종으로 번역된 헬라어 둘로스(δοῦλος)는 노예를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의 노예는 일종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도구가 생명이 없는 노예인 것과 같이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라고 했으며, ‘언어를 가진 도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노예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노예는 법적인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했으며, 주인은 마음대로 노예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종(노예)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일을 하다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다고 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인의 저녁을 준비해야 하고, 주인이 식사를 하는 동안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그 후에 주인이 먹으라고 하면 비로소 종은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종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이것이 종으로서의 의무입니다.
성경은 성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골 1:2)을 종에 비유했습니다(막 13:34 ; 눅 19:15 ; 요 13:16 ; 행 4:29; 계 1:1). 본문에서도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의 예를 들어 하나님과 성도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관계가 ‘주인과 종',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같은 성격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예에게는 보상이란 것이 없습니다. 품꾼은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품삯을 받지만 종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머슴이 있었는데, 머슴은 노비와는 다릅니다. 머슴은 품꾼처럼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임금(세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노비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눅 17:9)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종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밭이나 들로 나가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주인이 먹을 저녁을 준비하며 주인이 식사를 하는 동안에 그 옆에서 시중을 드는 것은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주인에게 사례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 의무를 다하되 그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 혹은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거기에 무슨 보상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 막는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보상심리’혹은 ‘공로의식’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고, 때론 불순종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어떤 보상을 기대하거나 자신의 치적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고전 1:29).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이뤄놓은 업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갈 6:14)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갈 6:15).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어떤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종에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고 그것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우리는 무익한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