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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롯의 처를 기억하라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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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22절 ~ 37절 [개역개정]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없음, 어떤 고대 사본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가 있음)
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설교문 보기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마 4:17 ; 막 1:15).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당시 로마의 압제로부터 시달리고 있던 유대인들은 성경의 예언(사 11:10 ; 61:1 ; 단 7:14)에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다윗 왕 때 누렸던 영화를 재현해 줄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요 1:41 ; 4:25). 그리고 그 메시아가 통치하는 왕국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와 그 왕국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임하는 것일까요? 이에 관해서 바리새인들이 묻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라“(눅 17:21)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곧 메시아 왕국이 예루살렘에 건설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그 장소를 한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였습니다(눅 11:20). 단지 그들이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 안에’라는 말은 ‘너희 가운데’라는 뜻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셨으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물음에 대답하신 후 이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여러 의미로 쓰였으나 신약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사용되었고 대부분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칭호였습니다. 그리고 ‘인자의 날(들)’에 대해서는 이를 현재로 보느냐 혹은 미래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로 볼 경우 인자의 날들은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이 땅에서 더 이상 예수님을 보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마 23:3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더 이상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로 볼 경우 인자의 날은 메시아가 통치하는 영광스러운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날은 재림의 때에 있을 것이고 아직 그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날들의 하루도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번개가 동쪽에서 번쩍이면 서쪽까지 번쩍임 같이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도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24:27). 예수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을 안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도 천사들이 그 사실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가 전해주고 설명해 주어야만 알 수 있는 은밀하고 애매한 형태가 아니라 번개가 동쪽에서 치면 서쪽까지 번쩍임 같이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고 또 볼 수 있게 오시기 때문입니다(마 24:30 ; 계 1:7).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저기 있다 여기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말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눅 17:23).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때가 어느 때와 같은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1. 노아의 때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홍수로 인해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달했지만(벧후 2:5)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세상적인 일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노아가 전한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2. 롯의 때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 이기적이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인물이었습니다(창 13:10-11 ; 19:8, 16, 33-35).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롯은 소돔 사람들과 타협하며 그들과 함께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돔 사람들처럼 방탕한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돔 사람들이 날마다 행하는 악한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몹시 괴로워했습니다(벧후 2:7).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그 죄악이 심히 무겁다’고 할 정도로 온갖 악한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창 18:20). 그들의 대표적인 죄악이 동성애입니다(레 18:22 ; 벧후 2:7-8 ; 유 7). 하지만 고모라와 소돔이 멸망한 이유가 동성애 때문만은 아닙니다. 에스겔 선지자에 의하면 그들은 교만했고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외면했으며 거만하여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죄를 범했습니다(겔 16:49). 그들은 노아의 때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등 세상적인 일에만 몰두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두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중에서 롯의 가족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비록 롯은 아브라함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그에게는 최소한의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돔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롯의 처는 달랐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의 멸망에서 건짐을 받았지만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 19:26). 왜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을까요? 그것은 재물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셨는데(눅 17:32)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눅 17:31). 본래 롯도 재물에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창 13:10, 11). 그래서 소돔이 멸망하니 피하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창 19:16). 하지만 일단 소돔을 빠져나온 후에는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렸습니다. 반면에 롯의 처는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그 결과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의 때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눅 17:31)는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어느 때든지 부르시면 아무 미련 없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눅 9장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마태에 의하면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서기관은 율법학자로서 고위 관리였는데, 대부분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한 반면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무슨 이유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던 것일까요? 서기관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을 찾아갔습니다(마 4:24, 25 ; 막 1:28 ; 눅 4:37). 그는 예수님 주위에 몰려든 군중 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7:29 ; 막 1:21,22 ; 눅 4:31,32). 이유인 즉 그 가르치시는 것이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서기관 역시 놀랬을 것입니다. 자신도 율법학자로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지만 자신이나 다른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위가 있었고, 사람들의 반응 역시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에 서기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겠다고 한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희생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그리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오래 떨어져 있을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엘리사도 선지자로 부름 받았을 때 부모와 작별 인사를 한 후 엘리야를 따랐습니다(왕상 19:20).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마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가족과의 이별 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 가족의 만류가 심할 경우 예수님을 따르려던 그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해서입니다. 밭에 고랑을 파기 위해 쟁기를 잡은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그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세상일에 미련을 두면 그 길을 온전히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앙생활을 종종 경주에 비유했는데(고전 9:24 ; 딤후 2:5 ; 갈 2:2) 달리기 경주에는 골인 지점에 ‘푯대’를 세워 놓습니다. 골인 지점에 ‘푯대’를 세워놓는 것은 경기자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경기자는 푯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경기자가 푯대를 향하지 아니하고 엉뚱한 곳을 향하여 달려간다면 그는 등수에 들기는커녕 실격하고 말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푯대가 있습니다. 이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히 12:2). 따라서 믿음의 경주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가 자기 부모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출 20:12 ; 신 27:16)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 즉 세상 사람들에게는 부모를 장사 지내는 일이 무엇보다 먼저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그 어느 것 보다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각오가 아니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이나 생각 그리고 주장 따위를 버리라는 것이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신앙을 위해 고난과 희생을 감수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은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1). 신앙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딤후 3:12).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가득한 소돔을 심판하신 이유는 훗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유 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경건하게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곧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들이 도처레 일어나는 것을 보며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마 24:33). 그때에 밭에 있던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데려감을 얻고 한 명은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마 24:40). 또 함께 맷돌을 갈고 있던 두 여자 중에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마 2:41 ; 눅 17:35)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눅 17:34).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를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노아의 때나 롯 시대의 사람들처럼 세상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또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됩니다. 바울처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빌 3:8) 오직 푯대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신앙에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