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음TV/주일예배설교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2023. 11. 5.

성경본문 보기

히브리서 2장 11절 ~ 18절 [개역개정]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설교문 보기

히브리서는 박해와 고난으로 인해 배교의 위험에 처해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즉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가 쓰일 당시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동족인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거나 잘못된 교훈에 미혹되어 신앙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이며 그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함으로써 어떠한 위협에도 흔들리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설 것을 권면하기 위해 쓰인 편지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그중에서 1장은 예수님께서 선지자나 천사보다 우월하신 분임을 강조하고 있고 2장 역시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해 강조함으로써 본서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신앙 안에 머물러 있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히 2:1).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그리스도에 관해서 들은 모든 것들 곧 복음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큰 구원'을 등한시 한 자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큰 구원'이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합니다(롬 4:13 ; 빌 3:9). 율법은 천사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히 2:2 ; 행 7:53 ; 갈 3:19). 히브기서 기자는 이 말씀 곧 율법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즉 천사들을 통해 주신 율법도 효력이 있어서 그것을 어기거나 순종하지 않았을 때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관한 기쁜 소식인 복음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것이라고 했습니다(히 2:3). 즉 복음은 천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전해 주신 말씀이며, 열 두 사도를 비롯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은 제자들이 그것을 확증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표적과 기사와 여러 가지 기적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그들의 증언을 뒷받침해 주셨습니다(히 2:4 ; 막 16:20). 이처럼 구원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전하시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전하는 자들과 함께 증언하실 정도로 죄인에게 있어서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소홀히 여기는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은 것처럼 그에 따른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히 2:3 ; 요 3:18).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핍박이나 유혹에도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끝까지 신앙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복음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곧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된 것입니다(히 13:14). 하나님께서는 장차 올 그 세상을 천사들이 다스리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한 것처럼(시 8:4-6) 모든 만물을 인자 곧 예수님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습니다(히 2:8).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잠시 동안이지만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야 했습니다. 즉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히 2:14) 죄인들을 대신해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고 또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히 2:9). 이는 구원의 창시자로서 ‘많은 아들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요 1:12 ; 엡 1:5)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 즉 장차 오는 세상에 참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히 2:10).

이제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 곧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영적으로 형제(자매)들입니다(히 2:11 ; 마 12:50). 모두 한 분 곧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히 2:1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들이라 부르는 것 혹은 그들의 형제가 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고 하셨습니다(히 2:12). 이는 시편 22편 2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헬라어역 구약성경인 70인역(LXX)에서는 '회중(카할, קָהָל)'을 '에클레시아(έκκλησία)'로 번역을 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로부터 불러낸 혹은 불려 나온 사람들'이란 뜻으로 신약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본래는 고대 그리스에서 공적인 목적으로 모였던 시민들의 모임을 말합니다(민회, 행 19:39).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 22편 22절을 인용한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13절에서도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인용했습니다.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히 2:13) 이 말씀은 이사야 8장 17절과 18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17절을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는 말로 요약하여 인용했고, 18절에서는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란 부분만을 인용했습니다. 이사야 8장에서 말하는 '나'는 이사야 자신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는 이사야의 두 아들 스알야숩(사 7:3)과 마헬살랄하스바스(사 8:3)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사야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그의 두 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모형으로 해석했습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와 그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가족처럼 친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한 자들 곧 피와 살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히 2:14).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의미합니다(요 1:14 ; 요일 4: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피와 살을 지닌 육체로 오신 것은 자신의 죽으심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죽음이 두려워 평생토록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히 2:15).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입니다(히 2:16). 즉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천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혈과 육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경험할 수도 없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천사들이 아닌 사람들의 죄를 속량 하시기 위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형제들과 똑같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처럼 피와 살을 가진 육체로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히 2:17). 대제사장은 제사장의 수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고, 제사에 관한 사항을 지휘 감독했습니다. 대제사장이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는 지성소에서 속죄하는 일입니다. 지성소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조차도 금지되었습니다(레 16:2).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이 1년에 하루 속죄일인 7월 10일(레 23:27)에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레 16:15) 자신을 비롯한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곳입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쳐져 있었는데(출 26:33), 이 휘장이 1년에 하루 대제사장에 의하여 걷혔다가 다시 닫혔습니다(히 9:7).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했습니다(히 10:20).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 27:51).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언제든지 그리고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살 길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히 10:19).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가지고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2:17 ; 9: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히 7:25 ; 10:19).

하나님께서는 시편 기자를 통해 예수님이 레위 지파 아론 계통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시 110:4 ; 히 5:6). 멜기세덱은 살렘 왕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창 14:18 ; 히 7:1).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란 이름의 뜻을 ‘의의 왕’이라고 했는데(히 7:2), 정확한 뜻은 '나의 왕(멜기)은 의롭도다(세덱)'입니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리스도를 가리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로 부른 것과 연결됩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멜기세덱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처럼 죄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의의 왕으로서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히 4:15).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대제사장이 필요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은 죄가 있었고,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론은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흠이 없는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지만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가지고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과 그리스도의 차이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죄 있음'과 '죄 없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없는 대제사장이야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완벽한 중보자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딤전 2:5).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인하여 더 이상 사람의 중보는 필요 없게 되었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요 1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베들레헴의 외양간이 아닌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로 주시려고 온 것입니다(마 20:28 ; 갈 1:4).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시험과 고난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히 5:7-8).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난과 시험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며(마 8:20) 능히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히 2:18).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시험이나 고난을 당할 때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롬 8:39), 우리를 위하여 온갖 멸시와 조롱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히 12:2) 끝까지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인내는 결국 소망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롬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