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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2023. 11. 8.

성경본문 보기

누가복음 18장 1절 ~ 8절 [개역개정]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때 곧 재림의 날이 노아의 때나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습니다. 롯의 시대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습니다. 노아의 때나 롯 시대의 사람들은 세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 일에만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러다가 물과 불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재림의 때에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언제나 기도하고 실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셨습니다.


어떤 마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주 재판관을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공정한 판결을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재판관을 찾아가 간청을 했습니다. 얼마 후 이 재판관은 과부의 원한을 풀어줘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 찾아와서 자신을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이 비유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서두에 밝히신 것처럼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인자의 때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중에 기도에 대해 언급하셨을까요? 그리고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를 중심으로 함께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과부는 자신의 원한을 풀어줄 사람이 재판관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과부는 고아와 더불어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로 종종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차별을 받았습니다. 율법에는 이런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들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재판에서 그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출 23:6 ; 신 27:19). 그렇다고 그들을 두둔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상관없이 또 사회적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재판하라는 것입니다(레 19:15 ; 신 1:17). 하지만 이러한 규례들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사 1:23).

과부가 찾아간 재판관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였습니다(눅 18:2). 그럼에도 과부가 그런 재판관을 찾아간 것은 도움을 청할 곳이 거기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그 재판관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그 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불의한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공정한 법집행보다는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되지 않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가난한 과부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눅 18:2). 과부는 자주 재판관을 찾아갔고 그때마다 외면을 당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계속 그를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이러한 모습을 ‘항상 기도하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했는데(살전 5:17), 같은 의미입니다. 기도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쉬지 않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호흡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쉬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과부가 계속해서 찾아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자 하루는 그 재판관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번거롭게 하다’는 것은 단순히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갈 6:17). 그리고 '늘'이란 '끝까지', 즉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란 뜻으로 과부의 호소는 그의 원한이 풀어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그로 인해 재판관은 계속 괴로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판관은 마지못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과부가 낙심하여 다음날 재판관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응답이 더디다고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시 40:1).

3.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재판관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부르짖다’는 말은 ‘큰 소리로 외치다’는 뜻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눅 11장에도 이와 비슷한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그가 한밤중에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이 사람은 잠이 들었다가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다소 기분이 불쾌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가족이 함께 자고 있는데 일어나 움직이면 식구들이 깨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아니 처음엔 그렇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친구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친구의 간청 때문이었습니다(눅 11:8). ‘간청(ἀναίδεια)’이란 말은 체면 불고하고 간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 사람은 염치 불고하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빵 얻기를 간구했고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되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들어주시면 좋고 안 들어주셔도 그만이라는 마음가짐으로는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문제를 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4.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인자가 올 때’(눅 18:8) 즉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마지막 날 곧 인자가 나타나는 때에도 노아나 롯의 시대와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일에만 몰두하다가 결국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늘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빌 3:14). 그런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많은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마 16:24).

당시 제자들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는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가서 그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특히 인자의 때, 재림의 날이 가까이 올수록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와 고난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재림 직전에 배교 곧 믿음을 배반하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살후 2:3).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는 믿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올 것을 약속하셨고(마 24:30 ; 요 14:3) 요한에게는 속히 오겠다고 까지 하셨지만(계 22:7, 12. 20)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언제 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주의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거나(벧후 3:4)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 2:4 ; 벧후 3:9).

그럼에도 예수님의 재림이 더디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낙심하여 믿음에서 떠나거나 믿음이 점차 식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간구했던 과부와 같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가 많지 않다는 의미이며 한편으로는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고 싶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 응답이 더딜지라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루어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과부처럼 끝까지 기도하되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믿음에서 떠나거나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박해와 고난은 심해질 것이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생들이 더욱 득세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딤전 4:1). 그런 자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살전 5:6 ; 벧전 5:8)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눅 21:36 ; 엡 6:18). 그래서 우리 모두 과부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