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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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8절 ~ 25절 [개역개정]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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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969년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입니다. 해질 무렵,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어느 시골 길가에서 두 사람의 떠돌이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소년이 와서 '고도는 내일 온다'고 말합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계속 고도를 기다립니다. 고도는 곧 온다고 하면서도 끝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고도를 기다리며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이 작품에서 고도가 누구인지, 왜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삽니다. 기다림이 없다면 그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삶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도 그 대상을 알지 못하고 막연히 기다린다면 그 기다림 역시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은 교회 절기상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待臨)이란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에 앞서 그의 오심을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한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천 년 전에 오셨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는가를 생각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대림절에 사용하는 예전색은 보라색으로 회개와 속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보라색은 왕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계 17:14)의 오심을 소망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절기가 바로 대림절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오심을 가장 간절히 소망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한 이후 수 백 년에 걸쳐 다른 민족들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으며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에는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다윗 시대에 누렸던 평화와 번영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린 것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근거합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한 선지자들의 말을 믿고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본문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예언들 특히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의 결혼 풍습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결혼은 보통 약혼(정혼)을 한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일단 약혼을 하게 되면 부부로 간주되어 남편과 아내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까지는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풍습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은 약혼을 했으나 같이 살지는 못했습니다(마 1:18). 그런데 이 기간 중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마리아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요셉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마리아는 결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부인할 수는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부정을 저지른 여인과 결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혼하기로 결심했는데, 이를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마리아는 수치를 당하게 될 뿐만 아니라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신 22:23, 24). 요셉은 마리아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요셉이 이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0-23)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은 이사야 7장 14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하스가 유다의 왕으로 있을 때 아람이 에브라임 곧 북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유다 왕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처럼 떨었습니다. 이제 곧 아람과 북이스라엘 동맹군이 유다를 치러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자기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 왕을 만나러 갔습니다. 스알야숩이란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으로(사 10:21)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라고 하신 이유는 유다가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하스 왕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람 왕과 북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점령하고 다른 왕을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사 7:4-8). 그리고 '한 가지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사 7:11).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확인하고 싶으면 무엇이든지 좋으니 표적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신명기(6:16)에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시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기도 하셨습니다(마 4:7). 그런데 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아하스는 이미 당대 최고의 세력이었던 앗수르를 의지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다가 아람과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왕하 16:7).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 왕을 책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보여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징조는 '처녀가 잉태(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는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 곧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려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갈 4:4)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비록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히 4:15 ; 7:26).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롬 3:10 ; 롬 3:23). 그럼에도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 1:8). 만일 예수님께서 일반적인 방법 즉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결합을 통해 태어나셨다면 그 역시 죄인이며, 그러한 신분으로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동정녀 탄생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동정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신했다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를 신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마디로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가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눅 1:31)라는 말에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눅 1:34)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눅 1:37)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마 19:26).
그리고 처녀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했는데,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혹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마 1:23). 이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으로 인해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천 년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원한 처소 곧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요 14:2-3).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의 강림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며 그날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꿈속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듣고 비로소 마리아가 간음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천사의 지시대로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으로, 당시에 흔한 이름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날 예수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입니다(마 1:21).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고(마 16:16)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요 1:1).
그러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것은 죄인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를 위해 대신 피를 흘려야 합니다. 피가 곧 생명이기 때문에 피로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입니다(레 17:11).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습니다(히 9:22).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피의 공로로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요 3:16 ; 행 16:31 ; 롬 1:16 ; 10:9, 13 ; 엡 2:8).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며 또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죄를 짓지 않았기에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모두 죄인이며 그러기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딤전 2:4 ; 벧후 3:9).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묻는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행 16:3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구원자(Savior)가 되심을 믿는 것(요 4:42) 이것이 바로 믿음이며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울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 10)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이유로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이름 대신 ‘주’라는 뜻의 '아도나이(אֲדֹנָי)'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이 칭호가 같은 의미의 '퀴리오스(κύριος)'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퀴리오스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마 22:44). 따라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 역시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로마 황제 역시 자신에게 이 호칭을 사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자신이 세상의 주와 하나님이며 사람들에게 그렇게 부르도록 강요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퀴리오스, 주로 시인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요 세상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요 4:42).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던 하나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지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살후 1:8-10 ; 롬 2:7-8). 그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의 강림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