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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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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19절 ~ 28절 [개역개정]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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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의 사명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살펴보겠습니다.

1. 참 빛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1:4).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시 36:9). 세상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기 때문입니다(1:3 ; 롬 11:36). 그리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님께서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요 12:46). 세례 요한은 이 빛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1:6). 그가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 빛이신 예수님(1:9)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1:7). 그를 믿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1:12) 그분 안에 있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 3:16).

2.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유월절 어린 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특명을 받고(출 3:10)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내 백성을 보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해 절기를 지키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출 5:1). 그러자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인데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출 5:2). 이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바로에게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 재앙은 바로의 장자를 비롯해 애굽의 모든 백성의 장자와 심지어 가축의 처음 태어난 것까지 모두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고센 땅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아홉 가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재앙은 애굽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 그것은 어린양의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입니다(출 12:7). 그러면 재앙이 그 집을 그냥 지나쳐 넘어갔기 때문에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출 12:13).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로 삼으라고 하셨는데(출 12:14), 이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했던 어린양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예표합니다(고전 5:7). 즉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진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을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서 구원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히 9:14).

사람은 아담이 죄를 지은 이래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롬 5:10). 그러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과 화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있게 만든 것이 바로 죄였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롬 3:25 ; 5:10 ; 골 1:22 ; 요일 4:10).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히 4:15 ; 요일 3:5 ; 벧전 1:19)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요일 4:10). 그러므로 누구든지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 5: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고 하면서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막 1:4 ; 눅 3:3 ; 행 13:24). 당시 유대교에서는 개종자 즉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고 그것도 개종자가 스스로 물속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직접 세례를 주었고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행해졌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죄 사함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전제로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죄의 고백 즉 회개가 선행되어야 했습니다(마 3:6 ; 막 1:5). 그래서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 죄 사함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세례를 통해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요한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견된 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은 “네가 누구냐”라고 묻는 그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오심을 갈망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눅 3:15).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사람들 역시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런데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고 반문했습니다(요 1:25).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째서 세례를 주냐’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산헤드린 공회에서 인정하는 사람만 세례를 줄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세례를 주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하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세례는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에게만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요한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가리지 않고 세례를 주니 자신들을 마치 이방인처럼 취급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나서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며 따져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했습니다(1:26-27) 당시에는 외출을 할 때 주로 샌들을 신었는데 가죽이나 나무로 밑창을 만들고 그 위에 끈으로 묶었습니다. 이 끈을 ‘신발끈’ 혹은 ‘신들메(들메끈)’라고 합니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이 외출했다 돌아오거나 손님이 방문하면 그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이 주인이나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겼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에 비하면 그의 신발끈조차도 풀 자격이 없는 미천한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표현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당시에는 그 집에서 가장 천한 노예가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거나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에 비해 자신이 그러한 일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마 11:9)인 세례 요한이 노예 중에서 가장 천한 노예가 하는 일조차 감당치 못할 정도로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1:34) 능력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1:1). 그리고 예수님은 물로 세례를 준 요한과 달리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십니다(1:33).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죄를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외적인 의식이라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시인하는 순간에 이루어집니다(고전 12:13). 그러면 내가 성령을 받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하고 그래야 성령을 받은 것입니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보면 은사문제에 대해 권면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방의 도시에 세워진 교회로 당시의 교회 중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문제 가운데 하나가 은사 특히 방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은사에 관해 언급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어느 교회보다도 은사가 충만한 교회에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에 대해 여러 견해가 그중에 하나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와 이교의 현상을 크게 혼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예수는 저주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만일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는 저주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다른 영입니다(고후 11:4).

반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κύριος)'는 일반적으로 권위에 대한 존경의 호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창 23:6 ; 24:18 ; 42:10 ; 43:20).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이유로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이름 대신 '아도나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이 칭호가 같은 의미의 '퀴리오스'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퀴리오스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마 22:44). 그런데 이방인들 역시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바울 당시에는 로마 황제를 나타내는 호칭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주로 시인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요 세상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주가 되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그 사람 안에 성령께서 계시는 것이고(고전 3:16 ; 엡 2:22)  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요 12:46).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아들들입니다(요 12:36). 빛의 특징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인 우리는 낮에 하듯이 단정히 행하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롬 13:13-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이유는 단지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엡 2:10). 이것은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목적입니다. 물론 선한 일이 구원의 수단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믿음이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엡 2:8, 9). 단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고후 5:1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빛의 자녀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