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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그의 이름은

2023. 12. 10.

성경본문 보기

이사야 9장 1절 ~ 7절 [개역개정]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설교문 보기

사람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갖는 것이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자아이의 경우 태어난 지 팔 일이 되면 할례를 행했는데(창 17:12) 그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눅 1:59 ; 2:21). 아이의 이름은 대개 부모가 짓지만 이스마엘(창 16:11)이나 이삭(창 17:19) 그리고 세례 요한(눅 1:31)처럼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이름도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에게는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마 1:20), 마리아에게는 천사 가브리엘(눅 1:26)이 직접 그녀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전해주었습니다(마 1:21 ; 눅 1:31).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는 아이의 이름을 왜 예수라고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마 1:21).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칠 백여 년 전에 그분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사 7:14)도 그중의 하나입니다(마 1:23). 물론 이사야 선지가 예수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그의 예언들을 언급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들이 예수님에 관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도 예수님과 관련된 것으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왕좌에 앉아 그 나라를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9:7).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그와 그의 자손이 영원토록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삼하 7:13,16), 다윗의 나라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계 17:14)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통치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한 아들의 이름을 다섯 가지로 표현을 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이름들입니다.

1. 기묘자(奇妙者)

'기묘자'란 '놀라운 일이나 기이한 것 혹은 그런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님과 그분이 하시는 일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사 29:14). 예를 들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나 그 예수님이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부인하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적그리스도 즉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요일 4:3 ; 요이 1:7). 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기이한 일이었으며 이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요 2:23 ; 3:2). 하지만 대부분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 분으로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선지자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대로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

기묘자라는 이름은 사사기에도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단 지파에 속한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그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며 또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이에 마노아가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여호와의 사자는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고 하면서 “내 이름은 기묘자라”고 대답했습니다(삿 13:18). (히브리어의 품사는 다르지만) 이사야가 언급한 이름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성육신 하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 즉 성자 하나님으로 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고 했습니다(요 1:15).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정도 늦게 태어나셨고(눅 1:26) 세례 요한보다 늦게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지만(막 1:14, 15) 그럼에도 세례 요한이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1).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기묘자이십니다.

2. 모사(謨士)

‘모사’란 ‘조언자’ 혹은 ‘상담자’란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부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 특히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그 뜻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그들의 슬픔을 위로하시며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딜 수 있도록 도우시고 격려해 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사는 ‘보혜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란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란 뜻으로, 법정에서 피고인을 변호하기 위해 재판관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보혜사는 정식 변호사가 아니라 보통 피고인과 가장 가까운 친구가 맡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라 하셨고(요 14:26) 예수님 역시 보혜사로 불리셨습니다(요 14:6 ; 요일 2:1).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요 15:15)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보혜사이시고 우리를 돕는 상담자이시며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마 28:20)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우리가 예배 때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합니다. ‘전능’이란 ‘불가능이 없다는 뜻’으로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 19:16 ; 눅 1:37).

전능이란 단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7장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십 구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7:1)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은 히브이어로 ‘엘 샤다이(אֵל שַׁדַּי)라고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나이는 팔십 구세였고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고 그녀로 하여금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7:16). 그러자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속으로 말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창 17:17) 사라도 그 얘기를 듣고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했습니다(창 18:13). 인간적으로 볼 때 사라가 자녀를 낳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세계기네스북에 등재된 자연임신을 통해 출산한 최고령자의 나이는 59세입니다. 체외수정(시험관아기)을 통해 70세가 넘어서 아이를 낳은 경우도 있지만 구십에 가까운 여자가 자연임신을 통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사라가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고, 아브라함을 가리켜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히 11:11-12).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십 구세의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소개한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 기보르(אֵ֣ל גִּבֹּ֔ור)입니다. ‘기보르’는 ‘능한’ 혹은 ‘용사’라는 뜻으로 히브리어의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엘 기보르’ 역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10:21 ; 신  10:17 ; 느  9:32 ; 시  24:8 ; 렘 32:18). 따라서 우리를 위해 주신 아들의 이름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심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빌 2:6).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 역시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나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일, 각종 병자들을 치료해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 등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으로(신 32:39) 예수님께서 그런 일들을 행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4.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

‘영존’이란 ‘영원히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는 이단 사상[양태론]입니다.

아버지라는 표현은 자녀와의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왕이나 선지자, 주인이나 보호자, 스승처럼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아버지라고 불렀고(삼상 24:11), 여호람은 선지자 엘리사를 아버지라고 했습니다(왕하 6:21). 나아만의 종들은 주인인 그를 아버지로 불렀고(왕하 5:13) 욥은 자신을 가리켜 빈궁한 자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욥 29:16). 또 바울은 제자 디모데를 아들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딤전 1:2, 18 ; 딤후 1:2). 이처럼 아버지라는 표현은 꼭 자녀에게만 관계된 용어는 아닙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가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존하신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은 마치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인 성도를 영원토록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5. 평강(平康)의 왕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외세의 침입과 핍박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항상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말이 평화 혹은 평강을 뜻하는 '샬롬'이었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시대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스라엘 한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셨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사 53:5).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였지만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사 53:6). 그리고 그 징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갈 3: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인류에게 평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롬 5: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아들은 기묘자이시고 묘사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초라한 외양간에서 태어나셨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 활동무대가 유대의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의 갈릴리라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분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 많고 권력이 있어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 하나님의 선민이라 자랑하며 스스로 의인인체 하는 사람들보다는 죄에 억눌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있으셨으며(마 11:19 ; 눅 7:34)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마 9:13).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요 14:27). 그분을 뵈올 날을 소망하며 날마다 주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