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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이 성전을 헐라

2023.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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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 13절 ~ 22절 [개역개정]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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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성전이 처음 세워진 때는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11년째 되던 해였습니다(왕상 6:38). 이 성전은 약 7년 6개월에 걸쳐 지어졌는데, 이를 일명 ‘솔로몬 성전’이라 합니다. 이 성전은 바벨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했을 때 파괴되었습니다(왕하 25:9). 그 후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스 6:15).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하는데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습니다. 이 두 번째 성전을 보수하고 증축하여 화려한 성전으로 바꾸어 놓은 사람이 헤롯(대왕)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주전 20년 혹은 19년 경에 성전을 수축하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주후 68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절기 때마다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특히 유월절이라고도 하는 무교절(눅 22:1)에 그랬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매년 열 가지 절기들을 지켜야 했는데, 그중에서 세 절기인 무교절(유월절)과 칠칠절(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장막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야만 했습니다(신 16:16). 하지만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한 후 많은 유대인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이 절기들에 참석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한 절기만큼은 꼭 참석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그 절기가 유월절(무교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매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집이 있는 가버나움(마 4:13)으로 내려가셨다가 며칠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곧 있을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함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어이없는 광경을 보셨습니다. 성전 뜰(마당)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서 흥정하는 소리가 들리고, 소와 양의 울음소리가 어우러져 성전 뜰은 그야말로 시장 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성전 뜰은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람들이 제사에 쓰일 소나 양 그리고 비둘기를 매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먼 지방으로부터 오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졌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제사에 쓰일 짐승을 끌고 오는 것보다 성전에서 그것을 사는 것이 편리했습니다. 또 성전 세를 내려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바꾸어 주기도 했는데, 성전세는 성전 유지를 위해 내는 일종의 세금으로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들은 반 세겔을 내야 했습니다(출 30:13 ; 마 17:24). 이 성전세를 내려는 사람들을 위해 외국 화폐를 유대의 세겔로 바꾸어 주는 환전소가 필요했고, 그 일을 성전 뜰에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리를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진 일들은 실제로는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파는 짐승들은 실제 가격보다 훨씬 비쌌고, 환전수수료 역시 높았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짐승을 사 올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직접 희생제물로 바칠 짐승을 가져오면 대부분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책임지고 있는 제사장들이 외부에서 반입하는 짐승에 대해서는 가급적 불합격 처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상인들에게 장소를 제공해 주는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았기 때문에 상인들이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했습니다. 결국 이를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은 제사장들이었고 그 배후에는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안나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이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 또 환전하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며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아버지의 집 곧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사 56:7).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누구든지 성전에서 예배할 수 있고 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이방인의 뜰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곳을 시끄러운 장터로 만들어 버렸고 그 장본인은 다름 아닌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처음 때와 마찬가지로 성전 안에서는 매매와 환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셨습니다(마 21:13). 처음에는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고, 지금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강도의 소굴은 말 그대로 강도들이 자신의 거처로 삼는 곳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죄악을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 안에서 불의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예배자들을 속이고 갈취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파는 것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보다 열 배 정도 비쌌고 안 살 수도 없는 상황이니 갈취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환전 수수료도 터무니없이 비쌌습니다. 힘 있는 자들은 나름 혜택을 받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횡포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를 통해 폭리를 취하는 대제사장은 제사장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강도의 우두머리에 가까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또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것에 화가 나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행동은 제자들로 하여금 한 성경구절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것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시편 69편 9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주의 성전을 위하는 열심이 내 속에서 불타 오른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주의 성전을 위하는 열심 즉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성전을 정화케 했고, 그로 인해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자들이 핍박을 당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입니다(딤후 3:12). 세상이 그런 자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요일 3:13). 그러므로 주를 섬기는 자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요 16:33). 비록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유대인들이 따져 물었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당신이 이런 일을 할만한 권리를 가졌다면 그것을 입증할 만한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당시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을 증개축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에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성전을 건축하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거늘 당신이 이것을 삼일 만에 세우겠다는 말이냐"며 황당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육체를 가리켜하신 말씀이었습니다.(2:21). 그러니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로 인하여 죽게 됨을 예언하신 것이고,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것은 죽은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서 만든 성막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출 29:42).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은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 4:24) 사람이 볼 수도 없고 본 사람도 없습니다(요 1:18 ; 딤전 6:16). 그런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지성소에 안치된 법궤입니다(삼하 7:2). 그래서 이 법궤가 있는 성막(성전)을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집‘(삿 18:31) 혹은 '여호와의 성전‘(왕상 6:37)이라 불렀습니다.

지성소 앞에는 휘장이 쳐져 있었는데(출 26:33), 이 휘장은 매년 하루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에 의하여 걷혔다가 다시 닫혔습니다(히 9:7).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했습니다(히 10:20).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 27:51).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언제든지 그리고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히 10:19, 20).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가지고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2:17 ; 9:12).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사 53:12).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이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요 3:1). 이 외에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 1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지는 것, 그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욕되게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가 성전이고(고전 6:19) 그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 3:16).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성도와 교회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했습니다(고전 3:17).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 역시 세상의 모임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나 중세시대의 교회나 오늘날의 교회가 별반 차이가 없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때문에 성도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지고 거룩하신 이름이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했습니다(벧전 1:15).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그의 그의 소유가 된 백성 역시 거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