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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2023.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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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 1절 ~ 15절 [개역개정]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 유월절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여러 기적을 행하시자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 믿었습니다(요 2:23).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런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요 3:2). 그렇다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만 믿었을 뿐입니다(마 16:1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을 신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예수님(요 1:3)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아실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그들의 믿음은 아니 사람들의 믿음은 마치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 같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더욱이 기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쉽게 싹이 나오지만 금방 시들어버리는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마 13:5, 6).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약 1:17) 그래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신 7:9 ; 사 49:7). 그러므로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으며 그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시 146:5).

예수님께서 유월절 기간 동안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를 믿은 사람들 중에 니고데모라고 하는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이 적대시하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숨겼고(요 19:38) 적지 않은 관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못했습니다(요 12:42). 요한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다고 말합니다(요 12:43). 하나님께 인정받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것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세상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의 지도자였고(요 3:1)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으며(요 3:10) 부자였습니다(요 19:39). 비록 로마의 압제 하에 있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과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그가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5). 아마도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문제로 예수님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였습니다(눅 17:20).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로 그 나라를 본다는 것은 그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새롭게 태어난다’, ‘다시 태어난다’, ‘위로부터 난다’는 뜻으로 중생과 같은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상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마 5:8). 그러기에 새롭게 태어나야만 합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거듭남 곧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니고데모는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요 3:10). 그래서 예수님이 영적으로 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육체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거듭난다는 것이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중생은 이방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지 하나님의 선민인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그러나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성령세례, 요 1:33]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행 2:38 ; 딛 3:5). 그런데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립니다. 고대로부터 많은 학자들은 물이 요한의 세례 즉 물세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세례는 성령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식입니다(롬 6:4). 반면에 물을 성령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칼뱅은 물세례가 구원을 얻는 결정적인 요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물은 그 다음에 언급된 성령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물에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7:38, 39). 또 물이 말씀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 자연적인 출생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처럼 물이 무엇을 가리키느냐에 대한 해석상의 논쟁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맑은 물로 씻음같이 죄에서 정결케 되고(겔 36:25 ; 히 1:3) 성령께서 주시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딛 3:5-7).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요 3:16, 17). 그리고 그 방법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렸던 것처럼 인자도 들어 올려지는 것입니다(요 3:14). 곧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인자와 놋 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습니다. 하지만 이 둘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입니다.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 13, 14장)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로 발길을 옮겨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38년이 지나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가데스는 에돔과의 경계지역으로,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이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데스에서 곧장 가나안에 들어가기보다는 가나안 동편으로 우회해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돔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가나안 동편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모세는 에돔 왕에게 그 땅을 통과하게 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에돔 왕의 거절로 이스라엘 백성은 지름길을 놔두고 또다시 고통스러운 광야 길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또 다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민 21:5). 이러한 원망은 거의 습관처럼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터져 나왔습니다(출 14:11, 12 ; 15: 23, 24 등). 그들에게는 도무지 감사가 없고, 불평과 원망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 징계하셨습니다. 불뱀은 주로 광야에 서식하는 독사의 일종으로 이 뱀에 물리면 즉시 온몸에 열이 생기며 극심한 고통과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광야는 항상 이러한 불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지만(신 8:15)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도구로 삼아 은혜를 모르고 불평만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자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그것을 쳐다보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뱀에 물린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쳐다 볼 것이고, 실제로 그것을 쳐다 본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민 21:9). 그렇다고 놋을 마든 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어서 그것을 쳐다본 자가 살아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살아난 것은 놋 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나음을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놋 뱀을 쳐다보지 않은 자들은 결국 고통을 당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 가는 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장대에 달려 있는 놋 뱀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단순합니다. 복음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만 그 복음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복음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히 4:2).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고,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먹지 않으면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요 3:17).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아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 3:15, 16). 죄인이 죽음의 형벌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행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