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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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 31절 ~ 36절 [개역개정]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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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2절 부터 30절까지입니다.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기간이 지나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의 다른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머무시며 세례를 주셨는데, 이 세례는 예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준 것입니다(요 4:2).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예식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정결예식이란 ‘부정한 것을 제거하는 의식’으로 여기서는 세례를 의미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에 관한 논쟁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 3:26)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예수님에게로 몰려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보다 예수님의 명성이 높아진 것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입니다(요 5:30). 이어서 제자들에게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요 1:20.) 그럼에도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지 그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언해야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었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증언도 없었습니다.
요한은 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29, 30) 당시 결혼 풍습은 신랑의 친구가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그리스도이고 신부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종종 하나님의 신부로 묘사되었고(사 54:5 ; 렘 3:20 ; 호 2:7 ; 말 2:11), 신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상징되었습니다(계 21:9). 요한은 신랑의 친구로서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을 신랑인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이 아닌 예수님에게로 간다는 것은 그의 역할이 끝남을 보여줍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그의 말대로 자신의 임무가 끝났으니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아쉬움보다는 오히려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를 직접 봤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증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영광이요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모습에서 우리는 겸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때 요한은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끌었습니다. 사람은 인기를 끌게 되면 욕심이 생기고 교만해 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겸손했습니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임무가 끝나자 아무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기를 끌면 끌 수록 더 많은 인기를 갈망하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록 더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지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으며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임무를 마친 후에는 일말의 미련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자신을 낮추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신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요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의 행세를 하거나 백성이 왕의 자리에 앉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다음으로 31절 부터 마지막 36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세례 요한이 직접 말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그의 말에 대한 복음서 기자의 설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왜 그분을 믿어야 하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요 3:31, 32) 여기서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예수님을 말하고 땅에서 난 사람은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요한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지만(요 1:6) 하늘이 아닌 땅에 속한 사람으로 땅의 것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로 인도할 뿐 그들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반면에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위임받으셨기 때문입니다(요 3:35 ; 마 28:18).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 곧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아들을 믿지 않는 자'라고 하지 않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한 것은 둘의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믿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면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요 3:16, 18). 여기에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든지 불순종하여 멸망에 처하든지 둘 중의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겔 33:11).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여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 벧전 3:9). 그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한때는 그분이 정말 메시야인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한 가지를 묻게 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19) 요한은 메시야가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오시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마 3:12). 하지만 요한이 옥에 갇히고 수 개월이 지났음에도 심판에 대한 어떤 징조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통해 들은 예수님의 행적은 심판의 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눅 7:18). 그래서 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당신이 오시기로 한 그 메시아가 맞느냐'는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요한이 이런 의문을 품은 것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야인지 의심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분의 사역에 대한 오해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야상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해는 의심을 낳고 의심은 불신을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이해가 안된다고 오해하거나 생각과 다르다고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갖는 오해 중 하나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 복이 어떤 복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영적인 것보다 세상적인 복을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Well Being)이 그들이 생각하는 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주린 자들, 우는 자들, 인자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6:20-22).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과는 큰 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거나 종교를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를 바로 알아야 오해가 없고, 오해가 없어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하기는 했지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큰 이가 없다(마 11:11)고 할 정도로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는 평생 약대 털옷을 입고, 석청과 메뚜기를 먹고 살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자신의 임무가 끝나자 아무 미련없이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삶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와 영광과 높임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