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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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11장 10절 ~ 19절 [개역개정]
10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우두머리는 이러하니라 이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윗을 힘껏 도와 나라를 얻게 하고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대로 함이었더라
11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학몬 사람의 아들 야소브암은 삼십 명의 우두머리라 그가 창을 들어 한꺼번에 삼백 명을 죽였고
12 그다음은 아호가 사람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세 용사 중 하나이라
13 그가 바스담밈에서 다윗과 함께 있었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그 곳에 모여와서 치니 거기에 보리가 많이 난 밭이 있더라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4 그가 그 밭 가운데에 서서 그 밭을 보호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으니 여호와께서 큰 구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15 삼십 우두머리 중 세 사람이 바위로 내려가서 아둘람 굴 다윗에게 이를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6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은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7 다윗이 갈망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 하매
18 이 세 사람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고
19 이르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이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그들이 자기 생명도 돌보지 아니하고 이것을 가져왔으므로 그것을 마시기를 원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설교문 보기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그에게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환난 당한 자들과 빚진 자들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윗을 찾아온 이유는 명확합니다. 당장 어떤 도움을 바라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다윗도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로 그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윗과 함께 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더 어려움에 처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윗에게로 모여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며 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삼상 18:14). 지금은 비록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하실 것이라 믿었고 그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그를 찾아온 사람은 400명가량 되었습니다(삼상 22:2). 그리고 얼마 안 가서 600명으로 불어나게 됩니다(삼상 23:13). 여기에 제사장 아비아달까지 합류를 했습니다. 그는 아히멜렉의 아들로 그 집안이 몰살을 당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삼상 22:20).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과 함께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삼상 22:23). 다윗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삼상 16:13).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했고(삼상 17:37) 늘 자신의 피난처요 도움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사람들은 점점 타락하고 쇠약해 가는 이스라엘의 희망을 봤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다윗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용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대상 11:10). 그들의 우두머리가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군사령관 요압을 제외하고 세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세 용사들과 두 번째 세 용사들 그리고 나머지 용사들입니다. 그중에서 두 번째 용사들의 무용담이 15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요압의 동생 아비새와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또 한 사람입니다.
곡식 벨 때(삼하 23:13) 즉 더운 여름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는 베들레헴에 주둔해 있었는데,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이 생각나서 그 물을 길어다 줄 사람이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세 용사가 블레셋군의 진영을 뚫고 들어가 그 우물물을 길어서 다윗에게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습니다. 이는 그 물이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피와 같은 물을 단지 육체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마실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라고 말한 것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고 개인적인 일로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만 자신의 소원을 얘기했을 뿐인데, 그럼에도 세 용사는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그 물을 가져왔습니다.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왕이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비록 그들의 능력이 첫 번째 세 용사들에게 미치지는 못했지만 충정만큼은 그들 못지않았습니다.
다윗의 용사들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삼하 23:37, 39 ; 대상 11:46). 암몬 사람 셀렉과 모압 사람 아드마 그리고 헷 사람 우리아 등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들입니다(창 19:37, 3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압과 암몬을 괴롭히지도 말고 그들과 싸우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거주하는 땅을 롯의 자손에게 유업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신 2:9, 19).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베풀기는커녕 이방 선지자인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려고 했습니다(신 23:4).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스라엘 총회에 참여하는 것 즉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을 영원토록 금지시키셨습니다(신 23:3). 그런데 왜 다윗은 그런 자들을 등용했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혈통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나든 이방 민족으로 태어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의 계획이나 바람에 의해서 혹은 그들의 조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요 1:13).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듯 모압 사람이든 암몬 사람이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차별도 없고 구분도 없습니다. 모두 한 백성이요 한 가족입니다. 다윗은 사람들을 등용할 때 어느 지파인지 어느 민족 사람인지 인맥이나 출신을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자들을 뽑았습니다. 용사들 중에는 다윗의 조카들도 있었습니다.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그들입니다. 요압은 군사령관이었고, 그의 동생 아비새는 두 번째 세 용사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사헬 역시 30인의 용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들이 용사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왕의 조카라는 인맥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고 이스라엘이 강국이 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대상 11:6, 10, 20). 이들 외에도 다윗의 용사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고 다윗을 위해 충성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강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다윗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도우심 있었고 다윗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충성한 용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는 끝까지 신앙의 편에 서지 못하고 반대편에 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압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군사령관으로 오랫동안 다윗에게 충성을 했지만 아도니야의 반란에 동조했다가 반역죄로 처형을 당했습니다(왕상 2:34). 아마사도 그중의 한 명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는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킬 때 그의 편에 선 자입니다. 학자들은 그를 역대상 12장에 나오는 아마새와 동일한 인물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마사 역시 30명의 용사 중 우두머리였습니다(대상 12:18).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되자 다윗은 요압을 대신해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아마사는 다윗의 자매인 아비가일의 아들로 요압처럼 다윗의 조카였습니다(삼하 17:25). 하지만 그 이유야 어떻든 반란의 선봉에 섰던 사람을 군대장관으로 삼으려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반란을 진압한 요압을 대신해 반란군의 대장이었던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불공평한 처사였습니다. 물론 다윗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요압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압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이는 등 자기의 뜻에 반한 일들을 했기 때문입니다(삼하 3:27 ; 삼하 4:14). 또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삼음으로 반역의 무리를 다시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이스라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자신에게 충성해 왔던 요압을 대신해 반란군의 우두머리를 군대장관으로 삼는다는 것은 공의로운 처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공의보다 개인의 감정과 이해관계를 앞세운 것으로 인간의 감정과 이해관계를 의식하다 보면 실수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요압은 이러한 다윗의 처사에 앙심을 품고 아마사를 죽이는데(삼하 20:10) 이는 결국 아마사가 압살롬의 반역에 동조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가 끝까지 다윗 편에 섰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거울삼아 개인의 감정이나 욕심 혹은 이해관계 때문에 신앙의 반대편에 서지 말고 항상 신앙 안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끝까지 다윗 편에 섰던 사람들처럼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변함없이 주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충성된 용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람과 관계된 것일 수도 있고, 자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 신앙이 위협을 받을 때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처럼 신앙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약에 나오는 데마처럼 신앙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힘썼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데마가 신앙 밖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바울은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합니다(딤후 4:10). 당시는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시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데마는 혹시나 바울과 같이 있으면 자기도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곁에는 언제나 고통과 순교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세상의 삶은 편하고 좋아 보였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5-17)이 데마를 유혹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세상의 안일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바울을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세상에 속한 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과 환난이 닥쳤다고 데마처럼 세상으로 나가거나 요압과 아마사처럼 신앙의 반대편에 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신앙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끝까지 신앙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치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2).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멸시와 조롱을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죄인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기쁨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디셨으며 끝내 승리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를 위해 모든 고난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분을 바라볼 때 지쳐서 낙심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히 12:3). 다윗과 함께 하셔서 모든 환난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오는 새해에도 우리와 우리 가정에 함께 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