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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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장 1절 ~ 13절 [개역개정]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설교문 보기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거나 세상과 타협하려는 사람들, 잘못된 교훈에 미혹되어 천사를 숭배하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천사가 ‘하늘의 대리자’ 혹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천사들 그리고 모세 등과 비교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왜 그분을 믿어야 하는지를 설파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꿈이나 환상, 음성 등 간접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셨지만 마지막 때에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히 1:2). 또 하나님께서는 모든 천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토록 하셨습니다(히 1:6). 이처럼 예수님은 선지자들이나 천사들보다 뛰어난 분이십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요 스승으로 여기는 모세보다도 우월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장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1. 모세는 피조물이지만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십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신실하고 충성된 종이었습니다(민 12:7). 그리스도 역시 자기를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충실하셨다는 점에서 모세와 동일합니다(히 3:2).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히 3:4 ; 요 1:3). 그러므로 모든 만물을 지으신 예수님은 피조물인 모세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분이십니다.
2.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하였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안을 맡은 아들로 충실하셨습니다(히 3:5, 6). 종과 아들은 다 같이 한 집에 속하지만, 그 신분과 지위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우월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분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고후 1:40). 그래야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소망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 우리는 그의 집 곧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유대교로 돌아가거나 세상과 타협하려는 사람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첫째,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95:7-11까지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광야에서 멸망한 조상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합니다(히 3:7-11). 그런데 이 시편의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시편 95:7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사흘 동안 갔으나 마실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라에 이르러 물을 얻기는 했지만 먹을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이에 백성이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하느냐’며 불평했습니다(출 15:24). 이러한 불평은 므리바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백성은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며 또다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곳 이름을 ‘시험하다’는 뜻의 맛사 또는 ‘다툰다’는 의미의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출 17:7).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에 대해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성경에도 그런 의구심을 갖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 시대에 성전에서 봉사했던 레위 사람 아삽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아삽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반면에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고 거만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들은 오히려 평안과 부귀를 누렸습니다. 이를 목격한 아삽은 고민하며 갈등했습니다. 왜 악인은 번영하는데 의인은 고통을 당하는가? 아삽은 이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앙의 갈등만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마침내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시 73:17). 아삽이 깨달은 것은 악인들의 종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형통하게 살고 고통 없이 평안하게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시 73:18).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갖는 오해 중 하나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형통하고 오히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해가 없어야 실망하지 않고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직접 보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능력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의심하고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부터 가나안 입성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 생각했고 그 여정 역시 순탄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곳곳에 난관이 있었습니다. 홍해가 그들의 앞길을 막았고, 먹을 음식과 마실 물과 광야의 험한 길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민 21:5). 그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했다면 원망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시며 맹세하시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시 95:11 ; 히 3:11). ‘내 안식’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으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며(신 12:9)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했던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민 32:11 ; 신 1:35). 다만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민 32:12 ; 신 1:36, 38).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 역시 영원한 안식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신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누구든지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 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완고하다’는 말은 ‘고집이 세다’는 뜻으로 마음이 굳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가리킵니다. 이 불신앙이 계속되면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서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죄는 그 속성상 쉽게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달려들기 때문에 아주 작은 틈도 내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죄의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유혹으로 인해 마음이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셋째,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어야 합니다.
‘시작할 때’란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를 의미합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처음 가졌던 믿음의 확신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도 있고(고후 1:7 ; 벧전 4:13)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빌 3:8).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감수해야 하는 것들입니다(롬 8:1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으셨고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롬 8:17).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롬 8:18). 믿음의 선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참고 끝까지 견디어 냈습니다. 우리도 그날을 소망하며 끝까지 신앙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미국 청교도 목사였던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는 '마지막까지 버티는 것이 곧 하나님이 당신을 선택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나 선지자들이나 천사들은 물론이고 모든 만물로부터 영원토록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롬 9:5).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과 태도를 완고하게 하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으로서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실했던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께서 죄인들을 위해 하신 일들을 깊이 생각하고 그분께서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