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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나답과 아비후가 그들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2024. 1. 18.

성경본문 보기

역대상 24장 1절 ~ 5절 [개역개정]

1 아론 자손의 계열들이 이러하니라 아론의 아들들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라
2 나답과 아비후가 그들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그들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3 다윗이 엘르아살의 자손 사독과 이다말의 자손 아히멜렉과 더불어 그들을 나누어 각각 그 섬기는 직무를 맡겼는데
4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 우두머리가 이다말의 자손보다 많으므로 나눈 것이 이러하니 엘르아살 자손의 우두머리가 열여섯 명이요 이다말 자손은 그 조상들의 가문을 따라 여덟 명이라
5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 이는 성전의 일을 다스리는 자와 하나님의 일을 다스리는 자가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도 있고 이다말의 자손 중에도 있음이라

 

설교문 보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했습니다. 이 일을 맡은 사람들이 레위인이고 그들 중에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는 예배를 감독하는 제사장의 직분이 주어졌습니다(출 28:1 ; 민 3:3). 그들 중에는 불의를 행하므로 더 이상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누구인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론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그들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과 다른 불로 분향을 하다가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켜 버린 것입니다(레 10:1, 2).

성경에서 불은 응답의 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심판의 도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불이 응답의 도구로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는 갈멜산 사건입니다.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갈멜산에 모였습니다. 누가 참 신인지를 가려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송아지 한 마리씩을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되 불은 붙이지 않고 각자 자기 신의 이름을 불러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엘리야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심으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인시켜 주셨습니다(왕상 18:38). 불이 응답의 도구로 사용될 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이 드려진 제물을 태운다는 것입니다(레 9:24 ; 대상 21:26 ; 대하 7:1). 이는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응답의 표시입니다. 반면에 불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될 때 나타나는 특징은 사람을 태운다는 것입니다(왕하 1:10, 12 ; 민 11:3). 나답과 아비후가 그렇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제사장의 직무 가운데 하나는 아침저녁으로 성소의 등불을 켜고 끌 때 향을 살라 바치는 것입니다(출 30:7, 8) 그때 사용되는 불은 반드시 제단에서 취해야 했습니다(레 16:12). 하지만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다른 불로 분향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셨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 이후 제사장에게 금주령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레 10:9). 포도주는 포도즙을 발표시켜 만든 술을 가리키며, 독주는 곡물이나 과일로 빚어서 만든 독한 술을 말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술은 사람으로 하여금 취하게 만드는데, 사람이 술에 취하면 여러 폐단이 발생합니다. 바울은 술 취함을 가리켜 '방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엡 5:18). ’방탕‘이란 ’절제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데, 술에 취하면 절제가 되지 않고 결국은 실수를 초래하게 됩니다. 노아가 그랬고(창 9:21) 롯이 그랬습니다(창 19:33). 또 술에 취하면 판단력이 흐려져서 그릇된 판단을 하거나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만해지기 쉽습니다.

술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재물도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명예나 권력 혹은 학문도 그렇습니다. 술 자체가 죄는 아니듯 그러한 것들이 죄는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거만하게 된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술을 멀리할 뿐 아니라 잠언 기자의 말처럼 아예 쳐다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잠 23:31). 그리고 주위에 있는 것들이 우리를 거만하게 만드는 술이 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처럼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불로 인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그들은 고라가 주도하는 반란에 가담한 이백 오십 명으로 각 지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민 16:35).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모세와 아론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고라는 아론과 같은 레위지파 고핫(그핫) 자손으로 사촌인 아론이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고라가 하는 일은 성막 안에 있는 기구들을 운반하는 일이었고, 그나마 그것들을 직접 보거나 만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사촌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성막의 기구들을 직접 관리하며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으니 상대적으로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고라의 반란에 가담한 자들 역시 모세와 아론에 대해 크고 작은 불만을 품고 있었고, 고라가 반역을 일으키려 하자 그에 동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고라가 맡고 있었던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민 16:9). 그 일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맡았던 제사장의 직분 못지않게 귀한 것입니다. 제사장 직이라고 해서 일반 레위인의 직분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모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중요한 직무였습니다. 교회의 직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목사나 집사나 맡은 임무가 다를 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소중한 직분입니다.

그리고 레위 자손이 성막의 일을 맡게 된 것은 그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들에게 성막의 일을 맡기셨고, 그중에서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제사장 직분을 위임하셨습니다(출 29:1).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에 대해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맡고 있는 직분이나 지위에 대해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불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한 나답과 아비후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르아살과 이다말만이 아론과 함께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민 3:4). 다윗 시대에 대제사장이었던 사독과 아히멜렉이 바로 이들의 자손입니다. 즉 사독은 엘르아살의 자손이고 아히멜렉은 이다말의 자손이었습니다(대상 24:3). 아히멜렉의 아버지 아비아달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부터 그와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삼상 22:20). 그는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 사독과 함께 대제사장에 임명되었습니다(삼하 20:25 ; 왕상 4:4). 그는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다윗 말년에는 그의 아들 아히멜렉이 대신 대제사장직을 수행했습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이 어려움을 당할 때 늘 그의 곁에서 함께 했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다윗의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야가 반역을 꾀할 때는 그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솔로몬이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대상 22:9, 10).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솔로몬의 모친인 밧세바에게 알려주었고(왕상 1:13), 선지자 나단을 비롯해 대부분의 신하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정식으로 공포된 것은 아니지만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자는 아도니야가 아니라 솔로몬이었습니다. 아비아달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도니야를 지지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에 대하여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왕상 2:27).

엘리는 이다말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삼상 1:9)이면서 사사로 활동했습니다(삼상 4:18). 그에게는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제사장이었지만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지켜야 할 규정을 무시했습니다. 예를 들면, 화목제의 경우 먼저 기름을 태워 하나님께 드린 후 제사장이 자신의 몫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레 7:29-34).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사환을 시켜 고기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하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삼상 2:17).

이러한 모습은 엘리 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로 활동하던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은 엘리의 아들들 못지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귀찮고 번거로운 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흠이 있는 짐승을 제물로 가져와도 신경 쓰지 않았고 그것을 제물로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상이 더럽혀졌으니 그 위에 있는 음식은 무시해도 괜찮아"(말 1:12)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또 자기 짐승 떼 중에 좋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맹세하고서도 막상 드릴 때는 흠 있는 것으로 바쳐 하나님을 기만하기도 했습니다(말 1:14).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말 1:6)이라고 하시며 '그들이 헛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누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말 1:10).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은 성전을 아예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마 21:13). 우리가 예배에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귀찮거나 번거로운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요 4:23).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이 악한 일을 행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적당히 꾸짖고 타일렀을 뿐 엄격하게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삼상 2:29). 그래서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받을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그들의 악행을 말리지 않았고(삼상 3:13) 아들들 역시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삼상 2:25). 이에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보내 엘리를 엄히 꾸짖으시며 그의 후손이 더 이상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삼상 2:33).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표징이 되었고(삼상 2:34 ; 4:11),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했던 엘리의 자손 아비아달이 대제사장 직에서 파면당하므로 그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이후로 대제사장의 직분은 끝까지 다윗과 함께 했던 사독과 그의 후손에게 맡겨졌습니다(대상 29: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시대 레위지파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구별된 자들입니다. 특히 제사장의 직분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결해야 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정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을 했고 엘리의 아들들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누구보다 모범이 되어야 할 제사장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는 망령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나를 소중히 여기는 자를 소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할 것'(삼상 2:30)이라는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히 9:12) 짐승의 제물도, 그 일을 맡았던 제사장들도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은 짐승의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영적 예배'라고 했고(롬 12:1), 베드로는 '신령한 제사'라고 했습니다(벧전 2:5). 우리는 짐승의 죽은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나오는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먼저 제물의 기름을 태워 하나님께 드린 후 자기 몫을 취했던 것처럼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시간도 그렇고 물질도 그렇고 삶도 그렇습니다. 내가 쓰고 남는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고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마 6:33).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올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