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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2024.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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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 39절 ~ 42절 [개역개정]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설교문 보기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멸시했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런 유대인을 증오했습니다. 그런 둘의 사이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이상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왜 그런 사이가 됐는지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기원전 722(1)년,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한 앗수르 왕은 일부 백성만 남기고 모두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다른 민족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습니다(왕하 17:24-40). 그들이 남아있는 이스라엘 자손과 결혼하여 새로운 민족이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들은 인종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혼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던 것입니다(왕하 17:33). 이것이 혼합주의신앙입니다.

기원전 537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 백성의 후손들 중 일부가 스룹바벨의 주도 하에 1차 귀환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스 1:3, 5). 성전 건축이 시작되자 그 소식을 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찾아와서 자신들도 성전을 재건하는데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신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며 줄곧 제사를 드려 왔으니 성전을 짓는데 동참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스 4:2). 그러나 스룹바벨을 비롯한 이스라엘 각 가문의 수장들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스 4:3).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을 유일신 즉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있는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긴다 해도 우상숭배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는 신이라 불리는 것들이 많이 있으나(고전 8:5)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참 신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안 계십니다(고전 8:6).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상숭배자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후로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멀리했고 예루살렘 성전 출입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적 전통을 세워나갔습니다. 기원전 4세기 경 그들은 자신들의 성전을 그리심 산에 건축함으로써 그곳을 신앙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그리심 산은 일명 ‘축복의 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모세의 명에 따라 그 산에서 축복을 선포한 것에서 유래합니다(신 11:29 ; 수 8:33).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서는 모세오경을 변형시킨 사마리아오경을 경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라고 했는데(신 27:4), 사마리아오경에는 에발 산을 그리심 산으로 바꾸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 했던 장소가 모리아 산(창 22:2)이 아닌 그리심 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왜곡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다른 성경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는데 제한적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잘못된 점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었습니다(요 4:22).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한 근본적인 이유를 하나님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했다는 것입니다(호 4:6).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 일차적인 책임은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었지만(말 2:7) 그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무관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하나님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외쳤습니다(호 6:3).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후손 격인 사마리아 사람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영적인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신 이유는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시기 위함 보다 그 여인의 영적 갈증을 채워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분이 선지자라고 확신한 사마리아 여인은 평소에 궁금했던 사항을 질문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예배의 장소가 어딘가 하는 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로 두 민족 사이에 심한 갈등을 겪었고 기원전 129(8)년에는 유대의 통치자 요한 힐카누스 1세(John Hyrcanus I)에 의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성전이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이후로 성전은 재건되지 않았지만 사마리아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심 산은 여전히 기도의 장소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예배의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고 싶었고 예수님으로부터 그 답을 듣기 원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요 4:21). 예배의 장소가 예루살렘이 되었든 그림산이 되었든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믿음 즉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또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형식보다는 드리는 자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보다는 중심을 보시며(삼상 16:7), 번제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더 원하고 계십니다(호 6: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찰하시는 성령(고전 2:10)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의지하고,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요 4:24). 그리고 예배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드려져야 합니다(롬 12:1). 그것이 곧 하나님께 열납 되는 예배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요 4:23).

사마리아 여인은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더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분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요 4:25). 사마리아인들은 신 18:15에 근거하여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와서 자신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요 4:26)고 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를 만났다는 벅찬 감격과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빨리 전하려는 마음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물동이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물을 긷는 일은 조금 수고스럽기는 하지만 나중에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야를 만나는 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요 4:29).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는데 그가 메시야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말을 듣고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 더 확고해졌습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 4:42)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만을 위한 메시야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롬 10: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음식을 사러 간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음식을 권하자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없는 사이에 누군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양식’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요 4:34). 그를 위해 예수님은 복음의 씨앗이 되었고(요 12:24) 제자들은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도록 보내심을 받았습니다(요 4:38).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도 이 제자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부도덕한 여인으로 낙인찍혔고, 그런 그와 어울리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비참한 처지에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내세울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지역 사람들이 천대하는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행 4:13). 세상의 기준을 볼 때 그들 역시 미천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택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