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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202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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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 2절 ~ 9절 [개역개정]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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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바로 앞에 있었던 한 사건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4:46 이하에 있는 내용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께서는 이틀 후에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가나(2:1-11)에서 또 한 번의 표적을 보여 주셨는데 이는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입니다(4:54).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 계실 때에 가버나움에 사는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당시 갈릴리의 분봉 왕이었던 헤롯 안디바(눅 3:1)의 신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서 여러 기적을 행하셨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라면 아들을 치료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그는 예수님이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사실 이러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목수로 일을 하셨습니다(막 6:3 ; 눅 2:51, 52).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이방의 갈릴리(마 4:15) 사람이라는 이유로(요 7:52) 그리고 같은 갈릴리 사람들조차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로 멸시했습니다(요 1:46).

특히 나사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목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막 6:3). 그래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요 4:44).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눅 4:24). 반면에 왕의 신하는 고위직 관리로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예수님보다 더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하인을 시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도우심을 원한다면 왕의 신하처럼 겸손히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많이 배웠다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내세울 필요도 없고, 못 배웠다고 가난하다고 의기소침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전혀 따지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나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신하의 요청과는 상관이 없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는 왕의 신하에게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믿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고전 1:22). 사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사람들 대부분은 무엇을 보아야만 믿으려고 합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속담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막 16:11 ; 눅 24:11). 심지어 도마라는 제자는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까지 했습니다(요 20:25).

갈릴리 사람들은 유월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고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시자 그를 영접했습니다(요 4:45).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들이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믿었습니다(요 4:41). 하지만 유대인들은 말씀이 아니라 표적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고전 1:22).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가버나움에 가셔서 병으로 죽어가는 그 아들을 고쳐주시리라고 생각했고 또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왕의 신하에게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먼 거리에 있는 병자를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1).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요 20:29).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그 순간 신하의 아들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하는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이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종들을 만나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때 아이가 낫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자기와 온 집안이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 4:5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회적 지위나 신분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도우심을 원한다면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겸손히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힘이 있으므로 우리는 단순히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그런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여러 문들이 있고 각 문마다 명칭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동물의 이름이 붙여진 문들도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양문(羊門, Sheep Gate)입니다. 이 문은 예루살렘 북서쪽 모퉁이에 있으며 이 문을 통해 제물에 사용될 짐승들이 들어왔는데 그중에서 양이 대표적인 짐승이었고 또 가장 많았기 때문에 ‘양문’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이 문을 스데반의 문이라고 하는데,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스데반(행 6:5)이 이 근처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행 7:58).

이 문 곁에는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자비의 집’입니다. 그리고 이 연못에는 행각 다섯 채가 있었는데, 행각(行閣)이란 지붕을 받치는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복도를 말합니다. 이 행각에는 언제나 많은 병자가 모여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연못에 얽힌 전설 때문입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전해져 내려온 것은 이 연못의 특성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본래 기드론 계곡에서 흘러온 빗물을 저장하여 성전에 공급하는 일종의 저수지였습니다. 이 연못 바닥에 샘이 있어 종종 물이 솟아올랐는데 그럴 때마다 물 전체가 움직였고 사람들은 이를 천사가 내려와 못을 움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연못은 간헐천 즉 온천으로서 피부병 등 일부 질병의 치료에 효능이 있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이 연못에 모여든 병자 중에는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38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그의 병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랫동안 힘겨운 인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베데스다 연못이 그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이내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야 병을 고칠 수 있는데, 그가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연못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들 자기 일에만 열중했지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38년 된 병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차츰 잊히어 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요 5:6). 그 병자가 베데스다 못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절망 가운데 있는 그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곧 현실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단지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연못으로 데려가 줄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자신을 연못으로 데려가 줄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던 것입니다(요 5:7).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는데(요 4:50)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렇게 말합니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믿음이 요청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치유에 있어서 믿음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 함에 있어 예수님께서는 인간에 의해 결코 제한받지 않으신다." 다른 치유 사건과 달리 38년 된 병자는 믿음을 수반하지 않고서도 치유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못하실 일이 없음은 확실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순간 38년 된 병자의 몸이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못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 못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도움은 없었습니다.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그가 의지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을 때 새로운 희망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의 병은 치료되지 않을 것입니다. 온천의 효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모든 병을 낫게 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38년 된 병자의 질병은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요 5:14). 그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병은 치유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서 그의 질병이 고침을 받는다 해도 영적 질병을 치유하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병으로 죽을 수도 있고,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히 9:27).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예수님이 없는 희망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참된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 사라질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둔 자들은 세상 끝 날에 절망하게 되지만 예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은 세상 마지막 날에 희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