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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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37절 ~ 44절 [개역개정]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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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되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초막절은 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지키는 절기로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출 34:322). 이 절기는 일주일 동안 지키는 절기였는데, 초막절이 끝나는 다음 날도 성회로 모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8일이 되는 셈입니다. 이 절기에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무교절(유월절)이나 맥추절(칠칠절, 오순절)처럼 의무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 중간쯤 되었을 때 성전으로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고 하면서 놀라워했습니다(요 7:15). ‘글’이란 글자를 뜻하기도 하지만(갈 6:11), 문서(눅 16:6)나 성경(딤후 3:15) 혹은 학문(행 26:24)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학문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에는 랍비 학교에서 율법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만 랍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교육을 받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랍비보다 잘 가르치셨고 어떤 율법 학자보다 성경을 많이 알고 계셨으며 거기에 권위까지 있으셨습니다(눅 4:32).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 몇이 말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요 7:25-27)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고 신성을 모독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요 7:1).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예로 들면서 그들의 주장이 부당함을 설명하셨습니다. 할례는 안식일과 더불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증표였습니다(창 17:11 ; 출 31:13).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를 안식일 준수보다 더 중요한 규정으로 여겼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했습니다(요 7:23). 이처럼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사람이 할례를 받는다면 안식일에 한 사람의 몸 전체를 성하게 만들어 준 것도 정당한 일입니다.
겉으로 보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가 율법의 규정을 어기는 것 같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안식일에 할례를 받는 것도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 역시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막 2:2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눅 6:9). 즉 안식일에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선한 일이기 때문에 결코 정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부당합니다(요 7:23, 24).
그리고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과 신약 중간 시대[신구약 중간기]에 기록된 문서들 즉 외경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분명히 그리스도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미 5:2). 이에 대해서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마 2:4-6)은 물론이고 유대인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요 7:42).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뭔가 대단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으스댔지만 실은 성경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마 2:1). 하지만 유대인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예수님을 단지 갈릴리 출신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편견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의심케 했습니다. 성경에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요 7:42). 그러니 갈릴리 출신의 예수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습니다. 심지어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요 7:52). 물론 사실이 아닙니다. 요나처럼 갈릴리 출신의 선지자들이 있었고(왕하 14:25) 갈릴리에서 메시야 혹은 선지자의 출현을 암시하는 예언도 있습니다(사 9:1). 성경을 연구하는 바리새인들이 이를 모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갈릴리에 대한 편견이 사실을 왜곡시키거나 간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들처럼 잘못된 선입관 혹은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마치 코끼리의 한 부분만을 만지고서는 그것이 코끼리라고 우기는 시각장애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알량한 지식으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 예루살렘 사람들이나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올 수 없다고 예수님이 선지자이심을 극구 부인했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논리적이고 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틀렸습니다.
그들과 달리 예수님을 그 선지자(신 18:15) 혹은 그리스도라 믿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해도 이분이 행하신 것만큼 많은 기적을 베푸실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요 7:31).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절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이날에 예수님께서는 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요한은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마지막 날에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절기의 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초막절 일주일 동안 대제사장은 실로암 못에서 금으로 만든 항아리로 물을 길어다 수문을 통해 제사장의 뜰로 들어가서 제단에 부었습니다. 이때 찬양대원들이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제단의 남서쪽에 매일 새로운 버드나무 가지를 세워놓고 그 주위를 순례자들이 한 바퀴씩 돌면서 시편 118편 25편을 낭송했다고 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불렀던 바로 그 시편입니다(마 21:9). 이러한 의식은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초막절에 다음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일종의 기우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초막절 의식과 관련해서 영적 생수에 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은 단순히 육체적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물이 아니라 영적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명수 샘물이며(계 21:6) 이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요 7:3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누구로 보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지만 그들 대부분은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그분을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분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을 바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16:24). 그래야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지쳐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2).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힘을 얻고 지쳐서 낙심하는 일이 없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