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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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13장 13절 ~ 22절 [개역개정]
13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고 그 뒤에는 복병이 있는지라
14 유다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자기 앞 뒤의 적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부니라
15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치시니
16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앞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므로
17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무찌르니 이스라엘이 택한 병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엎드러진 자들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18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항복하고 유다 자손이 이겼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
19 아비야가 여로보암을 쫓아가서 그의 성읍들을 빼앗았으니 곧 벧엘과 그 동네들과 여사나와 그 동네들과 에브론과 그 동네들이라
20 아비야 때에 여로보암이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
21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아내 열넷을 거느려 아들 스물둘과 딸 열여섯을 낳았더라
22 아비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행위와 그의 말은 선지자 잇도의 주석 책에 기록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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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등장하는 아비야는 열왕기상 15장에 나오는 아비얌과 동일 인물입니다. 그런데 열왕기 기자와 역대기 기자는 아비얌과 아비야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정반대의 행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왕상 15:3). 반면에 역대기 기자는 아비야가 왕위에 있을 때 치러진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대해 기록하면서 그를 하나님을 의지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아비얌은 아버지 르호보암이 그랬던 것처럼(대하 12:1)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했다가 나라가 점점 강성해지자(대하 13:21)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떠나 죄의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이름이 아비야가 아닌 아비얌으로 불린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지 모릅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본래 이름이 아비야인데 열왕기 기자가 마지막 알파벳을 혼동해서 아비얌으로 기록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비야에 '얌'이라는 이방 신의 명칭을 첨가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얌은 당시 동부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에서 숭배되고 있던 바다를 관장하는 신의 이름입니다. 아비야란 이름은 ‘여호와는 내 아버지시다’라는 뜻으로, 열왕기 기자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성호인 ‘야(야훼)’가 사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름을 변경시켰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열왕기가 아닌 역대기에 기록된 아비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비야의 아버지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는 평생 전쟁이 있었는데, 아비야와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비야는 사십만 명을 택하여 싸움을 준비하였고 여로보암은 큰 용사 팔십만 명을 택하여 그와 대진했습니다. 그때 아비야가 에브라임 산지의 스마라임 산 위에 서서 말했습니다.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무리들아 다 들으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4)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물질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오늘날보다 소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컸습니다. 당시 고기나 생선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금에 절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약이나 동맹을 체결한 후에 변치 않는 소금처럼 계약을 지속하자는 의미에서 언약의 당사자들이 소금이나 소금에 절인 고기를 나누어 먹는 의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소금 언약'이라고 했는데, 소금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민 18:19).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하여금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대상 17:11-14). 이를 ‘다윗 언약’이라고 하는데, 아비야가 말한 소금 언약은 이 언약을 가리킵니다. 아비야가 이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이 유다를 대적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로 둘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유다와 맞서 싸우려 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대하 13:8).
이어서 아비야는 북이스라엘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를 지적했습니다.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들이 너희와 함께 있도다”(대하 13:8) 여로보암은 왕이 된 후 한 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 건축 이후 예루살렘은 명실상부한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나라는 둘로 갈라졌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백성이 자신을 버리고 원래의 왕이었던 르호보암에게로 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들에게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 없이 단과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린 신이 송아지라고 하는데도 믿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유일한 여호와(신 6:4)가 아니라 그저 세상에 있는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등하고 나름의 종교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행 4:12).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딤전 2:5).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고 구원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요 14:6). 우리는 이것이 진리임을 믿습니다.
여로보암은 우상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섬기도록 했을 뿐 아니라 아론 자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대신 누구든지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오면 그에게 제사장 직분을 맡겼습니다. 물론 헛된 신들의 제사장입니다(왕상 12:31 ; 대하 13:8, 9).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이 왜 분열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같이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행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왕상 11:33).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이 일을 상기시키면서 "네가 만일 다윗처럼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왕상 11:38). 그러나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왕이 되었으니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어리석고 교만한 자라 부릅니다(약 4:16).
인생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어떤 일을 계획할 수 있지만 그 계획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생각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고 멋진 일을 계획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잠 16:3).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잠 16:9).
아비야는 여로보암의 불신앙을 지적하면서 자신과 남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켰으므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대하 13:10-12). 아울러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공격할 때 불려고, 나팔을 들고 서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대적을 치러 나갈 때 제사장들이 나팔을 크게 불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민 10:8, 9). 아비야는 하나님께서 유다와 함께하시니 유다를 대적하여 싸우는 것은 곧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고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아비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다를 공격 했습니다. 그는 복명을 보내 유다의 뒤를 포위하게 했고, 본진은 앞에서 유다를 쳤습니다. 앞뒤로 이스라엘이 공격해 오자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그의 백성에게 넘겨주셨고 유다는 크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라고 역대기 기자는 말합니다(대하 13:18).
신앙의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찾고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시 146:3).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 2)라고 고백했던 시편 기자처럼 우리는 위기에 맞을 때 자신의 힘을 의지하거나 사람의 도움을 구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대하 16: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이 둘로 나뉜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시작으로 모두 19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남유다 왕국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모두 20명의 왕들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중에서 8명은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처음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다가도 나라가 강성해지면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르호보암이 그랬고 그의 아들 아비얌이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후손들이 계속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다윗 때문이었습니다(왕상 15:4, 5). 비록 다윗이 죄를 범하긴 했으나(왕상 15:5) 그의 마음만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시 146:5).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감사했습니다(시 30:4). 죄를 짓고 책망을 받았을 때는 변명하지 않고 회개했습니다(삼하 12:13). 아담은 자신의 죄를 하와에게 돌렸고(창 3:12) 사울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삼상 13:12)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시 51:1-3).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왕상 15:5),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대상 18:14).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만을 섬기길 원합니다. 평안하고 잘 된다고 교만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말고 또 어렵다고 힘들다고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며 언제나 겸손하게 일편단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