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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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32절 ~ 43절 [개역개정]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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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교회에서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四旬)은 말 그대로 40일을 의미합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주일)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로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처음 제정되었습니다. 부활절 일자가 확정된 것도 이 회의에서 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이기 때문에 부활절 46일 전인 수요일에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주일 정확히는 종려주일 다음 날인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 혹은 ‘수난주간’이라고 하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을 ‘수난일’이라고 합니다. 이날은 통상 금요일로 알려져 있는데, 하루를 해가 질 때부터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시간 법에 따르면 목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날 새벽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후(막 15:15 ; 요 19:16)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의 가로목을 지고 형장으로 가셨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의 처형 방법 중 가장 잔인한 것으로 주인에게 위해를 가한 노예나 반역자 등의 중죄인에게 내리는 형벌이었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었던 가야바를 비롯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반역죄로 고발하면서 십자가형을 선고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으나(요 18:38)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마 27:24) 마지못해 그들의 요구를 수용했습니다(마 27:26). 가야바 일행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는 것을 보고 의기양양했겠지만 사실 이는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20:19 ; 요 12:32, 33 ; 18:32).
유대인들에게 십자가형 즉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했습니다(신 21:23).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해 주셨다고 했습니다(갈 3:13). 우리 죄인들이 받아야 할 저주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시고 형장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법정에서 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는 약 800미터로 갈수록 경사가 높아지는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채찍질로 인해(마 27:26 ; 막 15:15 ; 요 19:1)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자신의 몸무게와 맞먹는 십자가를 지고 경사길을 오른다는 것은 힘에 겨운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얼굴은 가시관으로 인해 피범벅이 된 상태였습니다(마 27:29 ; 막 15:17 ; 요 19:2).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가는 도중 여러 차례 쓰러지셨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로마 군인들이 그곳을 지나가는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마 27:32). 그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아프리카의 구레네에서 온 순례자였습니다.
골고다에 도착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손과 발에 쇠못을 박았습니다. 그때 시간이 제 삼시 오늘날의 시간으로 오전 9시였습니다(막 15:25). 그로부터 6시간 뒤인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시게 되는데(막 15:34), 성경에 의하면 이 시간 동안 예수님께서 일곱 가지 말씀을 남기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가상칠언(架上七言)’ 즉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말씀’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남기셨는지 시간 순서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본문 34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인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알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행 22:4).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행 22:3).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어리석고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이를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들까지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울러 나 자신도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롬 5:10). 그러면 상대방을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상칠언의 두 번째 말씀은 본문 4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죄수도 함께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매달렸습니다. 백성은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그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고 했습니다(눅 23:35). 군인들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하라”며 조롱했습니다(눅 23:37).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니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와 달리 다른 죄수는 오히려 예수님을 비방한 죄수를 꾸짖으며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0, 41) 이 죄수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마 27:44 ; 막 15:32). 그랬던 그가 왜 마음이 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추측건대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자신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끝까지 인내하시는 모습을 보고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며(눅 23:41) 예수님의 자비를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구원받았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 짧은 시간에 두 죄수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둘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졌으나 한 죄수는 그 기회를 잡았고 다른 죄수는 놓쳤습니다. 기회를 붙잡은 죄수는 구원받아 낙원에 이르렀고, 기회를 놓친 죄수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는 말이 두 죄수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구원받은 죄수처럼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즉시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단,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만입니다. 죽은 후에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고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히 9:27).
다음으로 가상칠언 세 번째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본문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여기서 아들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사도 요한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자여’라는 표현은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무례한 표현이 아니라 여성을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며 그에게 순종하셨습니다(눅 2:51). 하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는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애[공생애]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할 한 여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자기 아들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는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낳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영적인 가족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요 1:12 ; 6:40)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눅 8:21).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가 비록 육신의 어머니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 이상의 어떤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여자로 호칭하신 것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신 후에 곧바로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를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은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자 성도는 주 안에서 한 가족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마 12:50 ; 막 3: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 언덕까지 이르는 길을 가리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혹은 비아 크루시스(Via Crucis)고 합니다. 둘 다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는 '고난(수난)의 길'이란 뜻이고, '비아 크루시스'는 '십자가의 길'이란 의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가시는 동안 14번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묵묵히 올라가셨습니다(사 53:7).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이 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구원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히 12:2). 우리도 주님이 걸으신 그 길을 믿음으로 따라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