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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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17절 ~ 27절 [개역개정]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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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롬 10:9a). 이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이유로 '여호와(야훼)'라는 이름 대신 ‘나의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70인역은 여호와를 아도나이와 같은 뜻의 ‘퀴리오스’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퀴리오스’는 이스라엘 사람들 곧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마 22:44). 따라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요 20:28).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요 1:1).
둘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롬 10:9b). 즉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 앞에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케 하시고(엡 1:22)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빌 2:9-11). 이에 대해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시고(행 2:32)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행 2:36).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즉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구속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자 핵심입니다(롬 4:25 ; 엡 2:5, 6).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이고(고전 15:13),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고전 15:17). 그러나 분명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무덤으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올라오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 2:6).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부활의 의미를 함께 상고해 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두 곳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유대 '베다니'였고(요 11:18), 또 하나는 요단강 건너편 베레아 지방의 '베다니'였습니다(요 1:28).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에 계실 때(요 10:40) 유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요 11:1)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그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람을 보내 그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유대로 가셨고, 도착해 보니 이미 나사로는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들은 마르다는 곧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서 원망 섞인 하소연을 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이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시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주실 거라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압니다'라는 말 대신 '믿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여럿 살리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뿐이지만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모두 기록한 건 아니기 때문에(요 21:25) 그 외에도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소문은 금세 온 유대와 사방에 퍼졌습니다(마 9:26 ; 눅 7:17). 따라서 마르다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 오빠를 살려 주실 거라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짐작건대 아마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흘 동안은 소생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흘 동안 시신을 떠나지 않고 소생의 기회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이미 몸은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요 11:39). 그런 상태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그런 오빠를 다시 살리실 수 있을까? 마르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지금이 아닌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 때라고 생각했습니다(요 11:24). 당시 유대인들은 사두개인처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이라는 종말적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이 아닌 바로 지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확신이 없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부와 상관없이 죽은 사람은 모두 부활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부활은 아닙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요 5:29 ; 마 25:46 ; 고후 5:10). 즉 선한 일을 한 사람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부활하여 심판 곧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영원히 살고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요 6:40 ; 롬 8:11).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는 흙에 속한 육체가 아닌 하늘에 속한 몸을 입어야 합니다(고전 15:49). 그래서 죽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몸으로 살아나고, 살아 있는 자들도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고전 15:52 ; 빌 3:21). 이 상태를 가리켜 신령한 몸 혹은 영의 몸이라고 합니다(고전 15:44). 이러한 일은 마지막 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요 6:40, 44 ; 고전 15:51).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한 자가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고 했는데,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일'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6장 2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나님의 일이란 영생을 위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요 6:27)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기에(롬 3:10, 23) 스스로는 죄와 그의 결과인 죽음(롬 6:23)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주셨습니다(마 20:28).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저절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믿음의 조상을 두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혈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1:13). 또 교회에 다닌다는 그 자체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요 3:16). 어느 민족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로 찾아온 죽음(롬 5:12)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의 대화를 마치신 후 그의 동생 마리아와 함께 나사로가 매장되어 있는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 무덤은 동굴이었고,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자 마르다는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조금 전 마르다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을 살리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요 11:22). 그러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믿었으나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도 마르다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는 인정하지만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고(빌 2:6), 도마가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죽은 지 얼마나 지났는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루면 살리고 나흘이면 못 살리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루든 나흘이든 그 이상이라도 예수님께서는 능히 살리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1, 42)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가지 않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생의 가능성이 있다는 3일은 지났고, 이미 몸은 썩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 11:45).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요 11:53).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으며 눈을 감은 자들입니다(행 28:27). 그러니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행 28:26). 우리는 그들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부지런히 그리고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을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암 8:11).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죽은 자를 산 사람처럼 불러내셨습니다(롬 4:17). 나사로뿐만 아니라 장차 무덤 속에 있는 자는 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요 5:28). 그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요 5:29).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하시자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분리되었던 나사로의 몸과 영혼(약 2:26)이 다시 결합한 것입니다. 이는 장차 있을 부활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될 것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르다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하신 질문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 중에도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고전 15:12).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딤후 2:18).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이것이 복음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한 번은 죽기 때문입니다(히 9:27).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삶을 마치셨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행 2:24 ; 3:15). 그럼에도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고, 결국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잠자는 자들 곧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첫 열매라고 함은 다음 열매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 열매가 바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입니다(고전 15:23).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그 후에 살아남은 자들도 영의 몸으로 변화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