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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202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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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장 1절 ~ 16절 [개역개정]

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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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 북서쪽 모퉁이에는 안토니오라는 이름을 가진 요새 하나가 있습니다. 이 요새는 헤롯 대왕이 예루살렘을 방어하고 유대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로마 황제는 헤롯이 관할했던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그의 아들들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했습니다. 장남인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렸는데(마 2:22), 강압적인 정치로 유대인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예루살렘에서 소요까지 일어나게 되자 황제는 그를 폐위시키고 로마에서 직접 총독을 파견하여 유대를 통치하게 했습니다. 로마 군대가 주둔했던 곳은 항구 도시인 가이사랴로 이곳에 총독의 관저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요새에도 수비대를 주둔시켜 예루살렘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특히 유대인의 명절을 전후로 해서 총독이 안토니오 요새에 머물며 유대인들의 동향을 살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후 그를 결박하여 총독의 관저(관정)로 끌고 갔습니다. 이는 사형에 대한 로마 총독의 재가를 받기 위한 것으로(요 18:31),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일반적인 소송에 대한 판결과 집행은 할 수 있었으나 사형을 집행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백성을 미혹하여 질서를 어지럽혔고,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했으며,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요 그리스도라 주장했다는 것입니다(눅 23:2). 이는 모두 반역에 해당하는 죄로(요 19:12),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고 그렇게 판결했습니다(마 26:66 ; 막 14:64).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눅 3:1 ; 행 4:27)는 예수님을 심문했으나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눅 23:14 ; 요 18:38 ; 19:4, 6). 그래서 예수님을 채찍질 정도로 끝내려 했지만(눅 23:16)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하는 전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자를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 묻는 빌라도에게 유대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막 15:13, 14).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막 15:15).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아무 혐의도 찾지 못한 빌라도는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이 무죄임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고소한 종교 지도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채찍으로 그를 때린 후 석방하겠다고 했습니다(눅 23:14-16).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요 19:7).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두려웠습니다(요 19:8).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이 어떤 신과 관련된 것임은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의 아내로부터 꿈에서 그 사람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는 말을 들은 터였습니다(마 27:19). 그래서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힘을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 사람을 놓아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요 19:12)라고 외치는 유대인의 소리에 빌라도는 더욱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인 디베료(티베리우스, 눅 3:1)는 의심이 많고 포악한 인물이었기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일컫는 자가 있음을 알고도 처벌하지 않는다면 그런 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 일로 민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빌라도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빌라도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한 자였습니다. 그는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해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는 결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사람은 육체를 죽일 수는 있어도 영혼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오히려 사람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우리는 빌라도처럼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마 10:32, 33).

2.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기쁘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5장 15절에 따르면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풀어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기쁘게 하려고 예수님을 처형하도록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기 원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그들과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오는 갈등을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그들의 불의를 눈감아 주기도 합니다. 사실 대인관계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복음과는 다른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즉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누군가에게는 특히 율법에 익숙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는 바울이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배치되는 다른 복음입니다(갈 1:7). 그럼에도 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다른 복음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오히려 바울이 복음을 왜곡시켰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믿음만을 강조함으로써 구원을 위한 율법의 요구들을 포기하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으려고 혹은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믿음만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다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뿐입니다(롬 3:20). 죄인이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롬 3:26). 여기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단호히 배격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거나 그들의 기쁨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빌라도처럼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정의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란 공의와 거의 같은 뜻으로, 의로운 삶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확신했고 예수님을 보호하는 것이 올바른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정의보다 안위를, 공의보다 안정을 선택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빌라도와 같은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우선한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 했고(미 6:8), 예수님께서도 정의를 강조하셨습니다(마 23:23).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정의를 하찮게 여겼으며 공의를 땅에 던져 버렸습니다(렘 5:7). 예레미야 선지자가 백성을 향해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은 타락했고 결국은 멸망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은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중요하고 안위나 안정보다 우선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기도 합니다(롬 1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라도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기쁘게 하려고 했으며, 정의보다 안위를 더 우선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세가 그리심 산에 성전의 황금 기물을 숨겼다고 사람들을 꾀어 그리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반란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죽이고, 한 마을을 몰살시켰습니다.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당시의 로마 황제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는 로마로 소환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한 지역에 유배되어 생활하던 중 참수당했거나 자살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갈 6:8). 빌라도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며, 자신의 안위보다 정의를 더 우선했다면 최소한 신앙고백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언급되는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행 4:27). 나아가 빌라도가 두려워하지만 말고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오히려 신앙의 사람으로 남았을지 모릅니다.

우리도 때로 빌라도와 같이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빌라도가 아닌 바울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베드로도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에게 붙잡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강요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바울과 베드로의 대답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선택의 기준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