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음TV/수요예배설교

막달라 마리아

2024. 6. 6.

성경본문 보기

요한복음 20장 11절 ~ 18절 [개역개정]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다양한 계층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낮은 계층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눅 8:2, 3). 막달라는 갈릴리 해변의 작은 도시로 그곳 출신의 마리아는 요안나와 수산나 그리고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겼습니다. 여기서 이름이 언급된 여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악한 영들 혹은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눅 8:2). 특히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한 귀신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데(막 9:18) 일곱 귀신이 들렸으니, 그녀에게 임한 고통이 어땠는지 짐작이 갑니다.

마리아는 귀신들에게 이끌려 여성으로서의 품위를 잃어버린 채 추한 모습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처음 귀신 들린 사람을 봤습니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단발머리에 곱상한 외모의 여성으로 기억하는데,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먹을 걸 찾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뭘 찾았는지 그것을 먹다가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무서웠던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습니다. 지금도 그걸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합니다. 아마 마리아는 그보다 더 추한 모습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녀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심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 은혜가 너무 감사했던 마리아는 남은 인생을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섬겼으며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항상 함께했습니다.

구사의 아내 요안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학자는 구사가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왕의 신하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왕의 신하는 자기의 아들이 병들었을 때 예수님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아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왕의 신하와 그 가족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 4:53). 이 왕의 신하가 구사가 맞는다면 그의 아내 요안나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이유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즉 아들을 고쳐주심에 감사해서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던 것입니다. 물론 남편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고 구사 역시 그 일에 적극 협조했을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나 요안나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 그리스도를 죽음의 자리에 내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 그것도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롬 5:8). 그렇다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마땅한 삶이자 도리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는다고 해서 다 감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한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나병이 다 치유되었을 때 하는 일입니다(레 14장). 하지만 아직 그들은 나병이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갔고, 가던 중에 몸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나병환자로서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정상인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모든 게 예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깨끗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눅 17:15, 16). 그러면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마 자신들이 깨끗해진 것을 보이기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나병이 나았다는 판정을 받아야만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급한 일이 아닙니다. 조금 늦어진다고 병이 재발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영광도, 감사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께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은혜를 입고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가 짐승만도 못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짐승도 받은 은혜는 잊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를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은 인생을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고 물심양면으로 그분의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에도 함께 했고(막 15:40), 장사 지낸 후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는 요안나를 비롯해 다른 여인들과 함께 무덤을 찾기도 했습니다(눅 24:10).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막 16:1-2).

당시 예수님을 장사한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것(눅 23:53)으로 그 입구를 큰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마 27:66 ; 막 15:46). 그래서 여인들은 무덤을 향해 가면서 그 돌을 어떻게 옮길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막 16:3). 그런데,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해 보니 이미 돌은 옮겨져 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주의 천사들이 돌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마 28:2).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 일로 근심하고 있을 때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눅 24:6). 여자들이 무덤에서 돌아와 이 모든 일들을 열한 제자들과 나머지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신빙성이 없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만이 무덤으로 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했지만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이상히 여길 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무덤을 떠났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곧바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요 20:2).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마리아와 함께 무덤으로 갔는데, 그 사이 요안나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은 천사들로부터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녀들이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러 갔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도착해서 빈 무덤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시 16:10)을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요 20:9). 예수님께서 이 일에 대해 여러 차례 말씀하셨으나(마 16:21 ; 17:23 ; 20:19)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막 9:32) 기억하지도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뒤 마리아만이 홀로 무덤에 남았습니다. 그녀는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시신이라도 찾아서 다시 안장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곳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곳에 하나는 머리 쪽에, 다른 하나는 발 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천사들이 마리아가 왜 울고 있는지 몰라서 물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는데 왜 울고 있느냐는 의미였을 것입니다(눅 24:5, 6). 그때 누군가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이로써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요 20:14).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중에는 열두 사도를 비롯해 줄곧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던 제자도 있었습니다(요 20: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먼저 보이셨습니다(막 16:9).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리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를 먼저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셨습니다(요 20:17).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내 형제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열두 제자 혹은 남자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을 가리켜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형제라 부르신 것은 여기가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마 12:50 ; 막 3:35).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라고 했습니다(히 2:11). 왜냐하면 거룩하게 하시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내 아버지도 되고 그들의 아버지도 되시며 내 하나님도 되고 그들의 하나님도 되시는 분”(요 20:17, 현대인의 성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우리와 동등한 관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신 아들이시고 우리는 양자(養子)의 영을 받은 자녀입니다(롬 8:15).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토록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요 20:28 ; 롬 10: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를 끝으로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은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분명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제자들 가운데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행 1:14).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인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제자로서의 험난한 삶을 택했던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삶의 목적과 희망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믿음으로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