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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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24절 ~ 321절 [개역개정]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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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는 디두모라고도 불렸습니다(요 11:16, 20, 24 ; 21:2). 모두 쌍둥이라는 뜻으로 도마는 아람식 이름이고 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인 디두모입니다. 아람어는 예수님 당시 헬라어와 더불어 고대 근동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언어였습니다(막 5:41). 그래서 유대인들 가운데는 아람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욥바에 있는 여제자 다비다도 아람어식 이름입니다(행 9:36).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예수님께서 붙여주신 별명인데, 본래는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 게바라고 하신 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요 1:42).
도마가 어떤 제자였는지는 요한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그의 이름이 열두 제자를 소개할 때 딱 한 번 등장하는데(마 10:3 ; 막 3:18 ; 눅 6:15), 요한복음에는 네 번에 걸쳐서 여덟 번이 언급됩니다. 이를 통해 도마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한 마디로 도마는 불신앙에서 신앙으로의 여정을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신앙은 없지만 의리는 있었던 제자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예수님께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신 후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얼마 전에도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또다시 그리로 가신다고 하니 겁이 났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위험하다면 그를 따르는 자신들 역시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얼핏 보면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말 같습니다. ‘주와 함께라면 어디든 가리라’ 이런 느낌 말이죠. 하지만 이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 곧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잠든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정말 잠들어 쉬는 것으로 오해를 한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잠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잠들어 쉬는 것이라면 굳이 예수님께서 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깨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제자들도 그런 생각으로 대답했는지 모릅니다. 잠들어 쉬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나 깨우면 될 텐데 굳이 예수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가실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음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요 11:14). 즉 잠든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고 하신 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요 11:15).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자를 살리시는 것을 본다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눅 9:20)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살리시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안위가 최고의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였고 그들의 기대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신들도 세상의 권세를 가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더 크냐는 문제로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막 9:34, 46 ; 눅 22:24).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면 그 모든 기대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함께 가자고 하시는데, 제자 된 도리로서 못 간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에 도마는 마치 비장한 결단을 내리듯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시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고, 자신들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대로 가시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셨지만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더라도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16:21 ; 17:23 ; 20:19). 그럼에도 도마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날 거라 여겼습니다. 이는 불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말은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불신앙에서 나온 비관적인 발언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용기와 의리는 칭찬할 만하지만, 신앙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의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신앙입니다. 신앙이 없는 의리와 용기는 멋있는 것처럼 보여도 공허할 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신앙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해하지 않고 실족하지도 않습니다.
2. 분명하고 정확한 것을 좋아했던 제자
도마는 모르는 것을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분명하고 정확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 14:4) 그러자 도마가 반문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도마는 안 믿어지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한다든지,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길을 너희가 안다'고 하셨을 때, 도마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도마만 모른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이 말씀이 바로 도마로 인해 나온 말씀입니다. 그가 다른 제자들처럼 모르면서도 묻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은 것은 죄입니다. 모르면 배우면 되고, 잘못된 것은 고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면 아는 척하지 말고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3. 의심이 많았던 제자
도마처럼 분명하고 정확한 성격은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의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주를 보았다’고 말하자 도마는 자신이 직접 보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처음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고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믿지 않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믿지 않았습니다(막 16:11-13).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도마처럼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일로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인간의 부패함과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요 4:48). 물론 보는 것이 믿음에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이지 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롬 10:17). 예수님께서는 이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 아브라함에 한 가지 간청했습니다. 나사로를 보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 그의 형제들에게 경고한다면 그들이 회개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눅 16:29). 만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비록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그의 증언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눅 16:31).
체험이나 현상은 말씀에 우선할 수 없고, 우선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은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풍조에 흔들리거나 간교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4.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최초의 제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한지 8일이 지나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이 모여 있던 다락방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7). 그러자 도마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이는 베르도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한 고백보다 더 완전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도마는 칭찬받지 못했습니다. 그 믿음이 들음에서가 아니라 봄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20:29). 이는 비단 도마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 말씀을 읽게 될 모든 사람, 바로 오늘 우리에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당시의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믿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이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다면 비록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요 11: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요 10:37, 38). 제자들이 그것을 직접 목격했고,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요 20:31).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고도 잘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종 믿음이 적다고 혹은 없다고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마 8:26 ; 14:31 ; 15:16 ; 17:20 ; 막 4:40). 특히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다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요 20:27).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여전히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마 28:17).
사실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이 더 복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고도 믿지 않는 세상에서 도마와 같은 믿음이라도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맹목적인 신앙과 기복주의 신앙 등이 판을 치고, 온갖 이단이 활개를 치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이 어둠의 세상에서 예수님만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 고백이 변함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