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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2024.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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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9장 1절 ~ 6절 [개역개정]

1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3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4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5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설교문 보기

성벽 건축을 완공한 유다 백성은 일곱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모여 나팔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달 15일에 다시 모여 일주일 동안 초막절을 지켰고, 여덟째 날에는 성회를 열었습니다(느 8:18). 모두 규례에 따른 것입니다(레 23:34-36). 그런데 10일에 있는 속죄일을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그달 24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예루살렘에 모여 금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느 9:1). 이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봄으로써 신앙의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1.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일곱째 달 24일,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했는데, 낮 사분의 일 즉 3시간은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었고, 또 세 시간은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느 9:2). ‘굵은 베옷’은 거친 실로 짠 옷을 말하는데, 보통 염소 털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계시록에 보면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졌다’는 표현이 나옵니다(계 6:12). 여기서 상복으로 번역된 헬라어(삭코스)는 ‘굵은 베옷’을 가리킵니다. 이로 보건대 당시 굵은 베옷은 희거나 누런색이 아니라 검은색처럼 어두운 계통의 색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사 50:3). 굵은 베옷은 보통 애도를 표할 때 입었고(창 37:34 ; 삼하 3:31), 개인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재난의 상황을 만났을 때 입는 옷이기도 했습니다(왕상 21:27). 특히 하나님 앞에서 참회할 때 굵은 베옷을 입었는데, 이때는 금식하며 티끌을 머리에 뒤집어쓰거나, 재 위에 앉았습니다(느 9:1 ; 렘 4:8 ; 단 9:3 ; 마 11:21).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하면서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면서까지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주인이 아닌 종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느 9:36, 37).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잘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는 등 온갖 악을 행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풍요로운 땅에서 주인이 아닌 종으로 억압을 받으며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유다 백성은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을 하며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입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로우시고 더디 노하시며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결한 삶을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엡 5:9). 이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마땅한 삶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심한 성도라도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성결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 1:9). 이미 목욕한 사람은 손발만 씻으면 됩니다(요 13:10). 이는 목욕한 자도 손발은 씻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미 거듭난 사람은 또다시 중생할 필요가 없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짓는 죄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와는 무관하며 그래서 회개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떠한 죄도 지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며 지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요일 3:9).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을 받았고, 그와 동시에 우리의 신분은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롬 3:24). 그렇다고 우리가 죄와 무관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죄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7:17, 20). 바울은 이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롬 7:24).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보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문구가 있습니다(마 6:12 ; 눅 11:4). 이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와는 무관하며 그래서 회개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번 목욕했으니, 발을 씻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발을 씻지 않으려면 발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죄를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은 후로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미워해 본 적이 없습니까. 거짓말을 해 본 적도 없습니까. 항상 옳은 일만 하며, 늘 빛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까(요일 1:7). 만일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가 그 속에 없는 것입니다(요일 1:8).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죄를 범한 후에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도 발은 씻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짓는 죄를 회개함으로 씻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기 전에 먼저 이방 사람과 절교했습니다(느 9:2). ‘절교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달(기본형)’은 ‘나누다’, ‘분리하다’는 뜻으로, 유다 백성은 모든 이방인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 즉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계를 끊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먼저 그 집회에 이스라엘 사람들만 참석도록 했다는 주장입니다. 이 집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또 우상숭배 등 이방인들의 악한 풍습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겠다는 다짐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결혼이나 사업상 관계를 맺었던 이방인들과 단절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이고 이방인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서로 친교를 맺는 것은 빛과 어둠이 사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서로 어울릴 수도 없고 어울려서도 안 됩니다(고후 6:14, 16). 그렇다고 그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은 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고전 5:10). 다만 그들과 동업이나 결혼 등 친밀한 관계를 맺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인들과 통혼하거나 가까이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출 34:16 ; 신 7:3 ; 수 23:12). 왜 그러셨을까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출 23:33 ; 신 7:4).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방인과 통혼했고 그 결과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삿 3:6).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삼하 12:25)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명성을 떨쳤던 솔로몬조차도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함으로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습니다(왕상 11:2 ; 느 13:26). 그로 인해 이스라엘이 분열되고 결국은 멸망에 이르렀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스 10:2 ; 느 13:23). 우리는 이런 일들을 거울로 삼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곧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특히 이단에 속한 자들과는 그 어떤 관계를 맺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한 번 그 길로 들어서면 쉽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그런 길을 가지 않도록 위해서 기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3. 언약을 세웠습니다.

유다 백성은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 내용이 10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요약하면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하고, 안식일과 성일 그리고 안식년의 규례를 지키며, 성전세를 비롯해 소산의 첫 열매와 소산의 십일조 등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한 대로 그들은 시행했습니다(느 12:44).

이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그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마 3:8). 회개는 자복과는 다릅니다. 자복은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는 앞으로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포함됩니다. 회개는 이렇게 자복하고 다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복과 회개가 별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는 자복으로부터 시작해서 열매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고전 9:27). ‘몸을 친다’는 것은 '눈 아래 부위를 친다'라는 뜻으로, 당시 권투 선수들이 상대방의 얼굴을 가격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마치 권투 선수가 상대방 선수를 치기 위해 노력하듯 죄의 본성과 그로 인한 육체의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우리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도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들과 구별되기를 원하셨습니다(레 20:24). 그들의 풍속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면 우리는 성도의 탈을 쓴 옛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던 부패한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