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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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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장 1절 ~ 10절 [개역개정]
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2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5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8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9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10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설교문 보기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3대 왕으로 등극한 솔로몬은 밧세바의 넷째 아들입니다(삼하 5:14 ; 대상 3:5 ; 14:4). 그가 몇 살 때 왕위에 올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보통 20세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왕상 11:42). 솔로몬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있는데,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의 여디디아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평화'란 뜻의 솔로몬 역시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대상 22:9). 그 이름대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동안 평안과 안정을 주셨습니다.

솔로몬이 즉위하기 까지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형 아도니야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하며 일종의 반란을 꾀했기 때문입니다. 이러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열왕기상 1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다윗은 30세에 왕위에 올라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삼하 5:4, 5 ; 왕상 2:11). 그동안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을 견고히 했으며, 백성들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성군이 되었습니다(삼하 8:15). 하지만 그도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을 정도로 몸은 쇠약해졌고(왕상 1:1), 어느새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했지만 죽음만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왕상 2:1).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각각 선악 간에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14:10 ; 고후 5:10). 즉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믿음을 따라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진리를 거역하고 불의를 따라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갚으실 것입니다(롬 2:6-8).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적인 의미에서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삶이며(마 5:16) 참된 믿음의 증거입니다(약 2:18, 22).

 

2.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다윗이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아도니야가 이스라엘의 왕을 자처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넷째 아들(대상 3:2)로 첫째인 암논과 셋째 압살롬은 그 보다 먼저 죽었고(삼하 13:28, 29 ; 18:14, 15), 둘째인 다니엘(길르압, 삼하 3:3)도 어려서 죽은 듯합니다. 따라서 아도니야는 서열상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왕상 2:15). 하지만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은 아도니야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가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제일 연장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왕위가 계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솔로몬이 다윗 왕을 이어 왕위에 오를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삼하 7:12 ; 대상 22:9).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알려주었고(왕상 1:13), 선지자 나단을 비롯해 대부분의 신하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왕위에 오를 자가 정식으로 공포된 것은 아니지만 다윗을 이어 왕좌에 앉을 자는 아도니야가 아니라 솔로몬이었습니다.

아도니야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왕상 2:15). 그럼에도 아도니야는 스스로를 높이며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왕상 1:5). '스스로 높이다'는 말은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가리키는데(잠 30:32) 이를 교만이라고 합니다. 아도니야는 분수에 맞지 않게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왜 교만해졌는지를 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무엇보다 아도니야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 즉 매우 잘생긴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지도자에게 있어 준수한 용모는 백성들의 인기를 끄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초대 왕 사울도 그랬고(삼상 9:2) 압살롬도 그랬습니다(삼하 14:2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모보다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그리고 아도니야는 아버지 다윗에게 한 번도 책망을 들은 일이 없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도 아도니야의 잘못에 대해 지적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왕족으로서 돈과 권력이 있고 그 누구도 자신을 간섭하지 않으니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만이 아도니야로 하여금 잘못된 욕망을 품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려 했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반역을 꾀하다가 결국은 죽임을 당합니다(왕상 2:25).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도 안중에 없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이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 친근감의 표시였다고 해명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각 교단에서는 이 목사님의 이단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결정을 유보했습니다. 다만 일부 교단에서는 그 목사님 관련 집회 교류 및 참여 자제 결정을 내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의 발언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 목사님을 추종하는 자들로 그 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던 지지를 해주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으니 교만의 늪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교만은 우상 숭배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벧전 5:5).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분수에 지나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우리를 존귀하게 하지만 교만은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잠 18:12).

3.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할 때 그에 동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압과 아비아달이었습니다. 요압은 당시 군사령관이었고 (왕상 1:19) 아비아달은 제사장이었습니다(왕상 1:25). 요압은 오랫동안 다윗에게 충성한 사람이었지만 종종 다윗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습니다(왕상 2:5 ; 삼하 3:27 ; 20:10). 그리하여 요압은 다윗의 눈 밖에 났고,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요압은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할 경우 자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 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제사장 아비아달 역시 요압처럼 오랜 세월 동안 다윗과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 쫓겨 다닐 때도 함께 했고 압살롬에 피해 도망할 때도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다윗을 배반하고 아도니야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같은 대제사장 역할을 수행했던 사독에 대한 시기심일 수도 있고 다윗 왕에 대한 서운한 감정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아비아달이 요압과 함께 솔로몬이 아닌 아도니야 편에 선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비아달은 제사장 직분을 파면당했고(왕상 2:27), 요압은 여호와의 성막에서 죽임을 당하는 등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왕상 2:34).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그 시작부터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그것을 먹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마귀의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귀의 유혹을 따를 수도 있었습니다. 이 기로에서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고, 이는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롬 5:12).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 역시 잘못된 선택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430년간(출 12:41)의 이집트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은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러 가나안에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모두 12명이었는데, 그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은 40여 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모세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가나안 땅은 풍요롭고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거하는 성읍은 견고했습니다. 특히 그곳 사람들 중에는 아낙 자손이 있었는데, 아낙 자손은 신체가 크고 강한 거인 족속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은 이러한 사실을 열거하면서 비록 가나안 땅이 살기 좋은 풍요로운 땅이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사는 사람들은 강하기 때문에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때 두 사람 곧 여호수아와 유다 지파의 대표로 정탐 활동을 했던 갈렙은 다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은 가나안 민족이 강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민 14:8, 9). 12명의 정탐꾼들은 같은 기간 동안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정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보고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할 리 만무합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체험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기둥이 혹은 불기둥이 그들과 함께 있음에도 그들은 가나안 민족이 자기들보다 강하기 때문에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10명의 정탐꾼들은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바라보며 겁을 먹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아시다시피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편에 섰습니다. 백성들 역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선택이었습니다(민 14:35). 그들은 잘못된 선택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른 길 같지만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잠 16:25). 그러므로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히실 때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한 명의 강도는 구원을 받았지만 다른 강도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 짧은 시간에 순간의 선택이 두 사람의 영원을 좌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바른 길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주야로 성경을 묵상해야 합니다(시 1:2). 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교만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만은 사람을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을 받게 합니다(잠 18:12).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수고했다, 잘했다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